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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30 20:55
악보에 충실한 음악과 연주자의 느낌과 표현이 잘 담긴 음악.
(*.50.102.7) 조회 수 5324 댓글 12
둘 중 뭐가 좋은 음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실 대가들의 연주를 들어보면 굉장히 곡에 대해 충실하게 표현하는 연주자가 있는 반면에, 원래 기본적인 곡의 느낌과는 많이 다른 느낌으로 연주하는 연주자들도 있잖아요.
제가 고수는 아니라서.. 확신은 못하지만, 악보에 있어서 음이나 박자는 정확하게 지켜진다하더라도, 포르테나 피아니시모같은 음의세기라던지 속도에 있어서는 연주자마다 다른 해석을 가지고 연주하는 것같더군요.
과연 둘중 어느쪽이 좀더 좋은 음악이라고 할 수 있을가요?
사실 대가들의 연주를 들어보면 굉장히 곡에 대해 충실하게 표현하는 연주자가 있는 반면에, 원래 기본적인 곡의 느낌과는 많이 다른 느낌으로 연주하는 연주자들도 있잖아요.
제가 고수는 아니라서.. 확신은 못하지만, 악보에 있어서 음이나 박자는 정확하게 지켜진다하더라도, 포르테나 피아니시모같은 음의세기라던지 속도에 있어서는 연주자마다 다른 해석을 가지고 연주하는 것같더군요.
과연 둘중 어느쪽이 좀더 좋은 음악이라고 할 수 있을가요?
Comment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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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두가지길이 연주자의 선택이듯 둘중 어느쪽을 좋아하는 것도 듣는자의 선택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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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인 경우에는 작곡자의 의도를 충실히 표현하는 것을 우선으로하며,
초연이 아닌 경우에는 연주자에게 재량권이 주어진다 하더군요.
같은 곡 걑은 연주자라 하더라도 항상 같은 연주가 아닌, 근본적인 해석은 같으나
연주 당시의 여러 여건에 따라 조금은 연주가 다르게 된다 합니다.
어느 쪽이 더 좋다기 보다는 취향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 경우에는 현란한 멋을 내는 연주 보다는 연주자가 순수하게 자신의 연주에
몰두해 들어가는 연주를 좋아합니다. 약간의 실수는 괘념치 않는 편입니다. -
갑자기 루바토라는 말이 생각이 나는 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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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스스로 이야기하게 하냐 아니면, 해석에 의해서 좀 더 뚜렷하게 하느냐의 궁극적인 의도에 따른 접근방법상 차이에 기인한 듯합니다. 해석자의 그런 의향처럼 음악을 받아들이는 측면에서도 똑같은 고민을 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근데 양극단을 가버리면 한 연주는 즉물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다른 한 연주는 작곡자가 규정한 음악을 파괴한다는 비판을 받는다는 점에서 묘한 암시를 던지기도 하지요. 예술가중에서 즉물적이라는 평가를 동반하는 음악가를 보면, 지휘자 토스카니니. 기타리스트로서는 예페스 등이 대표적인 것 같습니다. 반면 음악을 파괴한다는 비판을 받은 최고의 음악가는 글렌굴드였죠. 엿가락처럼 늘린 샤콘느를 들려준 갈브레이스도 굳이 분류하지면 이런 범주에 든다고 봅니다. 이에 비해 세고비아나 푸르트벵글러같은 경우도 주관적이라는 비판이 있었지만, 그건 음악내애서 포용될 수 있는 단계에서의 평가였다고 봅니다. 굴드의 경우 바흐같은 추상적인 음악들에 생동감을 부여한 이면에는, 종전의 규범을 깨었다는 측면에서 낡고 고리타분한 음악의 방문을 활짝 열어 새로운 공기를 쐐게한 업적못지않게 아직까지도 헤프닝수준으로 평가하기도 하죠....
이런 단면과 해석자의 나이나 등등 여러 면을 보면 많은 변수들이 그러한 해석들에 영향을 줍니다. 다만, 연주자도 그렇고 곡을 만드는 작곡자의 경우도 그렇고 만년에 다다를수록 추구하는 대상을 더욱 추상적으로 하려는 모종의 일치(즉물성을 자세히 음미해보면 이건 도 다른 측면의 추상성으로의 회귀인 측면도 있습니다.)같은 게 보여진답니다. 같은 기교를 사용하더라도 형식적인 연주주법에서의 외형적인 그것보다도 미묘한 컨트롤로 음악을 재단한다든지 하여 정신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경향이라고 봅니다. 이는 존 윌리엄스같은 비교적 즉물적인? 성향이 있는 연주도 동일하더군요. 그의 젊었을 때의 샤콘느와 더 나이들었을 때의 샤콘느가 차이를 보이죠. 성숙해진 연주자나 작곡가의 그런 면은 쉽게 비유하면 극장판 영화와 감독판 영화와 차이를 보면 쉽게 알수가 있습니다. 같은 영화라도 극장판의 경우는 관객이 원하는 뚜렷한 해피엔딩의 결말을 보여주지만, 감독이 훨씬 선호하는 감독판의 결말은 주인공을 죽게 만든다든지 하여서 자신의 작품이 여운이 더 남게 하길 원하죠. 연주도 은은하면서 여운을 남기는 연주가 가장 좋은 포지션인 것 같습니다. 예술의 가장 숙성된 형태인 이런 오래토록 좋은 여운을 남기는 연주가 되려면 기본적으로는 정확한 악보 해석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다음으로 이를 바탕으로 음악에 대한 상념을 부여하는 전체적인 조감을 잘 잡는 것이 중요하고요. 그런 두개의 확고한 틀속에서 미묘하게 밀고 당기는 음악을 꾸려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렇게 본다면 어느 것이 더 낫냐는 것보다는 얼마나 그 조화점을 기분좋게 찾느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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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음악의 목적은 소리를 통해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약간은 종교적인 의미도 있는데 ...
작곡자가 작곡을 했다고 해서 그 음악을 그가 완전히 창조해 낸 것인가 ?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작곡자도 다만 아름다움을 발견해 낸 것이라고 보는 거죠
따라서 연주자가 원곡을 조금 바꾸거나 작곡자의 의도와 다르게 연주한
결과가 더 아름답다면 그 연주자의 행동은 타당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
이런 논의가 이루어지려면 먼저 두세 가지 전제를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는, 음악이 추상이긴 하나 언어라 함이 통설인데, 그렇다면 작곡자가 악보에 담긴 기호로써 표현한 말이 과연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해석해내고, 그걸 다시 알기 쉽게 음으로 바꿔서 청중에게 전달한 연주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부터 객관화 되어야겠지요. 이는 기준이 되는 연주라 할 수 있는만큼, 이를 위해서는 또 음악문법에 따른 해석론이 전제의 전제가 되겠지요.
한편, 이건 '즉물적'이라는 표현과는 무관한 개념일 것입니다. 해석론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청중이라면, 또는 악보를 단지 연주기능을 위한 매뉴얼 정도로 인식하는 학생이라면, 어떤 연주자의 다소 딱딱해 보이는 연주가 악보대로만 하는 것이라는 오해를 하게 되겠지요. 이런 면에서 볼 때, [오래토록 좋은 여운을 남기는 연주가 되려면 기본적으로는 정확한 악보 해석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라는 BACH2138님의 말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둘은, 작곡자가 관습적 문법 및 음표/쉼표, 박자/리듬, 화음/화성, 악식, 편성 등과 악상기호로써 표현한다 해도 그건 수단으로서 완전한 것이 아니므로 그 나머지는 연주자의 유추해석에 달린 문제가 되겠지요. 해석에 상당한 융통성이 있다는 건데,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문리해석을 기초로 하는 유추해석이어야지, 그렇다고 해서 연주자가 제멋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건 청중에게 전달되어야 할 작곡자의 말을 왜곡한 것이나 다름없지요. 그건 한마디로 엉터리 연주라 할 것입니다. 비록 듣기 좋게 꾸며졌다 하더라도... (오락음악과 구별되는 점)
루바토 같은 것도 비근한 예에 속하는데, 루바토에 내재하는 어떤 규칙이 없다면, 그건 제멋대로 연주인 셈이고, 그렇다면 '루바토'라는 음악용어는 그 자체가 필요없는 것이 되고 말겠지요. 또, 루바토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이냐 하는 기교적인 방법론 이전에, 과연 그 대목에서 해석론에 따라 루바토가 적용될 수 있는 구간이냐 하는 점이 전제가 될 것입니다. 그 대목이 과연 연주자에게 주어진 유추해석/기속재량 부분이냐 하는 것이지요.
재해석이라는 말은 어떤 기존 해석의 정/부에 대한 것이지 작곡자에 대해서는 성립되지 않는 말일 것입니다. 작곡자의 언어는 이미 악보에 객관화 되어있기 때문이지요. 연주자의 해석은 자유재량행위가 아니라 기속재량행위일 뿐입니다. 클래식 기타음악계의 문제점이라면, 정통 클래식과 기타음악에 모두 정통하고 있는 비평가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일 것입니다. 세계적으로도... 그건 기타음악이 아직 정통 클래식 주류에 편입되지 못하기 있기 때문이겠지요. 하루빨리 주류에 편입되는 일, 이게 어쩌면 전체를 위해서는 가장 시급한 일이 아닐까 합니다. -
또같은 악보를 보고 제가 연주하는것 하고 크리스토퍼 파크닝이 연주하는것 하고는 엄청난 차이가 있겠지요.
같은 곡을 지휘자에 따라서 전혀 다르 느낌을 주며 감동도 틀리듯이 작곡자의 의도를 완전 무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연주자의 느낌을 (각각 다르겠지요)나타내는 연주가 더 좋은 연주라고 생각합니다.고잔 클래식 곡을 10대가 연주한다면 10대만이 가지는 특유의 맛이 있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
많은 분들이 주옥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연주나 음악감상시 피가 되고 살이 될 이야기라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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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워..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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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주관은 해석의 객관 의 바탕하에서 표출되어야 좋은 연주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상당수분들이 감정의 주관과 해석의 객관을 둘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계시는 듯 합니다.
위에 언어라는 개념으로 gmland 님께서 해주셨는데 차용해보자면
"기본적인 문법은 지키고 있는 상태에서 청자기 납득할 수준의 억양을 자기의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쯤 될거라 보시면 됩니다. -
이런 생각, 이 세상에 완죤한 음악 있을까 .. 싶군요, 마치 완전한 인간이 없는 것 처럼 말이죠, 우 글을 읽으며 문득 ... 음악에 대해 그 존재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곡이 너무 좋아 한참을 땀으로 연습했더니, 거진 칠 무렵 문득(?) 싫어지는 것 있죠 ... 오늘 아침, 침묵과 고요함을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평정"이라 할가요, 어쩌면 "중용"이라 할가요,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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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자의 손을 떠났을 땐 ... 그 곡은 작곡자의 곡이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연주자의 재량에 따른 곡으로 변한다는 의미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