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나도 서울대 논술 붙을 자신없다"
원로 문학평론가인 이어령 전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서울대 논술시험을 거론하며 현행 글쓰기 교육의 문제점을 정면 비판했다.
이 전 교수는 30일 등단 50주년을 맞아 중앙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나 역시 요즘의 서울대 논술시험을 통과할 자신이 없다”며 “명색이 50년 동안 글을 썼다는 나도 이런 방식의 글쓰기 시험엔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이 전 교수는 “세상에 글쓰기의 전범이 어디에 있느냐. 글쓰기의 틀은 또 무엇이냐”며 “백 사람이 글을 쓰면 백 개의 글이 다 달라야 하는 것 아니냐. 이와 같은 시험 제도는 글쓰기를 감금상태에 몰아넣는 짓”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획일화한 글쓰기 교육이란 도도한 광풍 속에서 자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은 살아남을 수 없게 됐다”이라고 덧붙였다.
이 전 교수는 좋은 글쓰기에 대해 “제 생각을 쓰면 된다.남의 생각을 자꾸 내 글에서 쓰려고 하니까 좋은 글이 안되는 것”이라며 “누구나 제 생각이 있는 것이고 그걸 자신있게 밝히는 용기만 있으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전교수는 “제 생각이 없으면 감히 없다고 쓰고, 아무리 바보 같은 생각이라도 자신의 생각을 충실히 옮긴다면 좋은 글의 자격은 일단 갖춘 것”이라며 “어휘가 부족하거나 논리가 약한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만 쓴다면 독창성 있는 글쓰기가 될 수 있다. 글쓰기 작업이 황금이냐 배설물이냐의 차이는 독창성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서는 “인문학도 위기고,공학도 위기인데 이유는 간단하다”며 “지성과 지식의 창조원이 마르고 있기 때문이며,상상력과 창조력이 고갈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파당 의식이 가장 큰 문제”라며 “옛날에 과거 치다가 망한 게 우리나라인데 과거에서 모범답안을 못 써내면 출세를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결국 획일화를 강요했기 때문인데 최근의 한국문학도 사정이 비슷하다”며 “주례사인지 비평인지 모를 글이 요즘 우리 문학엔 너무 많다. 고전적 의미에서의 비평은 사라지고 해석만 남은 것 같다. 자유인이 아니면 올바른 비평을 할 수 없다”고도 했다.
이 전 교수는 ‘정치인들의 품위 없는 말과 글도 문제’라는 지적에는 “언어에는 아름다운 말과 속된 말이 있는데 이 두 개가 합쳐져 하나의 국어가 되는 것이 있다”며 “점잖은 말이 있기 때문에 상스러운 말도 탄력을 받는 것인데 두 가지의 말 가운데 상스러운 말만 통용된다면 그건 국토의 상실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 전 교수는 “고운 말을 쓰면 바보가 되고, 거친 말을 써야 어울리게 되는 건 전적으로 사회의 책임”이라며 “국어는 국가의 품위에 관한 것인데 지도자들이 먼저 품위를 훼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전 교수는 향후 글쓰기 계획에 대해 “최근에 완간한 전집 30권은 문학이론서 등 사고의 체계에 관한 글은 뺀 것인데 그것만 정리해도 열 권 정도가 될 것 같다”며 “이것 말고 펴내고 싶은 건 시집이며,거기에서 내 글쓰기 인생 반세기를 정리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 전 교수는 ‘평론가·교수·칼럼니스트·장관 등 수많은 직업 가운데 하나만 택한다면’이란 질문에는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나는 크리에이터(creator)로 불리고 싶다”며 “광고 쪽에서 주로 쓰이는 말이고, 크리에이터를 대문자로 시작하면 조물주를 뜻하기도 하지만 창조적인 상상력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란 내 뜻에 가장 가까운 단어인 듯 싶”고 말했다. 그는 “장관·교수·평론가 등 어떠한 직함도 나에겐 생소하고 어색하다”며 “그냥 선생으로 불렸을 때 마음이 가장 편하다”고 말했다.
1956년 5월 6일자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란 글을 발표하며 문단에 발을 디딘 이 전 교수는 88올림픽 개막식을 총지휘했고, 초대 문화부 장관(90~91년)을 역임했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63년),‘축소지향의 일본인’(82년), ‘디지로그’(2006년) 등은 130편의 저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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