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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tarMania

한국어
2006.07.18 07:56

미지의 길...

(*.165.248.96) 조회 수 4601 댓글 7
해외에서 만나게되는 우리나라 분들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한데요.
이 글 쓰신 분이 브리즈번 골드코스트나 L.A 다운타운에서 만났던 젊은 분들 중의 한 분이셨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인터넷 서핑하다가...많이 공감이 되서 퍼왔습니다. 글쓰신 분이 많이 다른 분들께 널리 읽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원한다고 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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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찾는 걸음이 아름답다’ (나의 발걸음)

많은 분들의 지적처럼 비판적이고 비관적이고 무능력하고 어이없기까지 한 첫 번째 글의 주인공은 바로 제 자신이었습니다.
아주 똑같지는 않지만 상당부분이 저의 이야기였습니다.
앞서도 밝혔지만 이 글을 올리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저의 살아온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사실 상당히 오래, 짧지 않은 글을 이미 썼다가 순식간에 날려버린후 마음을 다잡고 다시 쓰는것입니다)


저는 20대 시절, 10년이 넘는 기간동안 14가지의 직업을 가져봤습니다.
커피숍 종업원, 술집 종업원, 호텔종사원, 여행사직원, 외국 현지 관광가이드, 무역대행회사(물류) 영업사원, 식당 종업원, 서류배달원, 다단계판매원, 요리사보조, 초등학교 보습학원 교사, 보험회사 영업사원, 운전기사, 청소부 등.
여기까지만 얘기하면 ‘그 정도 안 해본 사람이 어디있냐’고 할 사람이 많을것입니다.

문제는 왜 그렇게 많고 다양한것을 해봐야 했었느냐입니다.

호주에 워홀비자로 처음 방문하기전에 그당시 그래도 꽤 이름있던 괜찮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인정도 받고 좋은 실적도 냈었고 아직 틀이 잘 잡혀있지 않던 부서에서 일하며 서류양식부터 일하는 시스템을 제가 다 만들어놨습니다. 그 부서에선 아직도 그때 제가 만들었던 양식과 업무처리 방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2년쯤 다니고 나니까 조금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괜찮은 회사였지만 이대로는 그냥 평범한 월급쟁이 이상은 살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호주 워홀 비자를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만 해도 워홀 비자가 그렇게 보편화 되어있던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주변에서 말렸고 일하던 부서에서 발령이나 다른 사람들이 다 가고 싶어했던 팀으로 옮길수 있는 기회까지 주어졌지만 박차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호주로 왔습니다.
회사 다니면서 젊은 나이에 싱글 남자가 술값 조금씩 아껴서 모아두었던 800만원으로 준비해서 떠난 호주여행이었습니다.

떠날땐 나름대로 포부도 많았습니다.

영어도 확실히 배워서 내 실력도 향상시키고 여행도 많이 해서 일년뒤엔 아주 다른 사람으로 업그레이드 되어서 돌아오리라.

초기 정착이 다행히 순조롭게 풀렸고 바로 영어학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달반쯤 되니까 조금씩 지겨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사이에 친해진 한국인 친구들과 자주 만나게 되었고 아침이 되면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는게 힘겨워지며 나중엔 출석률 80%를 맞추고자 머리를 굴리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대로 수료는 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글에 썼던것처럼 3개월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영어학교를 마치게 되니까 가져왔던 돈이 바닥이 났습니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일을 구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굳이 투잡까지는 뛰지 않아도 방값내고 생활비 정도는 할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일 하나를 더 구해서 했어야 돈을 조금이라도 모았고 그 돈으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거나 여행을 할수 있었을텐데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나태하고 안일해져만 가는 제 마음은 그냥 한가지 일만 하면서 혼자서 영어문법책이라도 좀 보면서 공부하고 주변 가까운데 여행도 하다가 또 기회가 되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냥 그 자리에 주저 앉게 만들었습니다.

6개월이 되니까 생각만큼 혼자 문법책이나마 들여다 보는 것은 고사하고 일 마치고 돌아와서 친구들과 잡담나누고 리스닝 연습을 핑계로 TV만 늦게까지 들여다보다가 잠자리에 드는 생활이 뭔가 아닌것 같다고 느껴졌습니다.

학원이라도 다시 다니자! 워홀비자로 다른 학원을 또 다니는 것은 사실상 불법이었습니다만 그래야 그나마 영어라도 좀 더 배울것 같아서 아무것도 모르는 부모님께 전화해서 더 공부를 해야겠기에 돈이 필요하다고 졸라서 12주를 또 끊어서 학원을 시작했습니다.

이미 안일해질대로 안일해진 저의 정신상태는 부모님 호주머니 뒤져서 시작한 영어학원을 2주만에 그만두게 했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무의미한 시간만 보내는 일상이 계속 되었습니다.

9개월쯤 되니까 한국에 돌아갈 걱정에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영어를 익힌것도 아니고 경험을 충분히 쌓은것도 아니고 여행을 신나게 다닌것도 아니고 처음 떠나올때나 지금이나 뭐 다를게 없는 것 같은데 이대로 돌아갔다간 남들에게 비웃음 받는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끝장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이미 9개월이 된 상태에서 별다른 표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10개월이 되자 ‘이렇게 돈만 날리고 시간만 보내느니 차라리 하루라도 일찍 들어가서 거기서 뭘 찾아보던가 다시 시작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워홀비자 12개월도 다 채우지 못한채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겨우 10개월전이었는데 그사이 한국 상황이 많이 변해있었고 IMF가 터지기 직전으로 경제상황이 상당히 안좋아진 상태였습니다.

10개월전엔 분명히 내가 비집고 들어가서 먹고 살았던 ‘내 자리’가 있었는데 10개월후에 와보니까 내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한국사회는 그 사이 100m라는 거리를 진행했는데 10개월전 100m 뒤의 내 자리에서 빠져나와 호주에 나와 지내면서 나도 똑같이 100m를 진행한것이 아니라 20m, 30m만 진행한것이다 보니 다시 돌아갔을때 20m, 30m의 자리에는 다른 사람이 들어앉아 있었고 저는 그 자리에 끼어들어갈 틈이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구하지 못하고 놀기시작한지 3개월이 되었고 그 사이 답답해하시는 부모님과 사이만 나빠지면서 점점 압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호주에 있을때 다녔던 교회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 났습니다.

“아직 호주는 (브리스번은) 그렇게까지 한국인들이 많지 않은 곳이니까 너만 마음을 먹는다면 여기와서 살수 있는 기회를 잡기에 좋은 곳이다. 여기서 공부해라. 미래를 준비해봐라. 그러면 네 인생이 달라질꺼다.”

‘그래, 호주로 돌아가자. 내가 있을곳은 호주였나보다.’

호주로 돌아왔습니다. 이번엔 학생비자로 왔습니다.

그래, 해보자와 실제로 와서 하는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학생비자를 받아서 해보자, 살아보자 하는것과 진짜 학생으로 공부하며 살아가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더라는 말입니다.

정말로 공부를 위해 온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자리를 못잡아 쫓기는 심정으로 학생비자를 받아 온 것이기에 공부가 들어올 리가 없었고 이전에 10개월동안 있으며 회화실력이나마 어느정도 다져놓은것도 아니었기에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힘들었을 과정도 아닌데 너무나 어렵고 힘들게만 느껴졌고 결국 얼마되지 않아 학교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한국도 갈수 없고, 호주도 더 있을수 없고,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고민하다가 미국에 계신 친척집이 생각났습니다.

그래, 미국에 가보자. 큰 물은 다를거야.

친척이 저를 먹여살려야 하는 의무를 띄고 미국에 이민 간것은 아니었습니다.

친척집에 갔지만 더 먼 친척, 저희 어머니도 “그런 친척동생이 있긴 있었던것 같다”라고 하실 정도의 먼 친척집이 막 미국에 이민와서 시작하신 중국요리 식당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래도 그동안 살면서 해본것은 많기에 평생 건축일만 하시다가 자식들 때문에 미국 오셔서 식당을 시작한 그 먼 친척분의 일을 좀 도우라는 미명하에 보내어진 것이었습니다.

하루에 14시간씩 일했습니다. 주방이며 홀이며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14시간중 밥먹는 시간 포함해서 딱 30분 쉴수 있었습니다.

13시간 30분은 앉지않고, 쉬지않고 일해야 했습니다.

닭띠 분들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그때 그 시절 이후로 제가 닭띠를 별로 안좋아합니다.

그 먼 친척분이 닭띠였는데 (물론 띠가 문제는 아니겠지만) 본인도 쉬지 않고 일했지만 남도 쉬는 꼴을 못봤습니다.

본인은 손님없을때 창고에 들어가 누워서 잠을 잘 망정 제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기가 막히게 아시고 불러서 일하라고 다그쳤습니다.

3분정도 앉아있으면 바로 불러서 쓰지 않는 그릇 때라도 벗기라고 일을 시켰습니다.

집에서 잠은 그 집에 7살짜리 아들과 4살짜리 딸이 쓰는 작은 어린이 이층침대의 일층을 빌려서 잤는데 발을 다 뻗을수가 없었고 앉으면 윗 침대에 머리가 닿는 곳에서 잤습니다.

매일밤 혼자 창문으로 달을 보며 일기를 쓰고, 윗 침대의 그 집 아들이 깰까봐 이불을 뒤집어쓰고 미니 손전등으로 갖고 갔던 손바닥만한 성경책 들여다보며 위안을 삼아 살았었습니다.

가게에서 일이 마치는 늦은 밤이 되면 부인과 자녀들 네명이 가게로 와서 그날의 수입을 계산하면서 아이들은 음료수 빼먹으로 뛰어놀고 부인은 함께 돈 세며 웃음꽃을 피웠습니다.

그동안 저는 혼자서 주방과 홀을 청소했습니다.

중국식 식당이기에 닭요리가 많았고 닭을 직접 손질해서 쓰기에 닭 찌꺼기며 갖은 음식 쓰레기들이 큰 파란색 원통형 쓰레기통에 두통 가득히 매일밤 나왔습니다.

건물뒤에 큰 쓰레기 차가 세워져 있었는데 청소의 마지막 단계로 파란 큰 음식물 쓰레기통을 그 쓰레기차로 가져다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두웠고 또 미국사람 쓰레기차여서인지 모르지만 쓰레기 차 높이도 높아서 그 무거운 음식물 쓰레기통을 머리위까지 혼자 들어올려서 버려야 하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유난히 바뻤던 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혼자서 쓰레기를 버리러 갔습니다.

특히 더 무거웠던 그 음식물 쓰레기를 혼자서 죽을힘을 다해 머리위로 들어올렸을때 닭찌꺼기 국물이 새며 그 오물에 손이 미끄러지면서 쓰레기통 한통을 머리부터 거꾸로 완전히 뒤집어 썼습니다.

닭껍질, 뼈다귀, 피, 육수, 음식쓰레기, 기타 별별 더러운 오물로 범벅이 된 상태로 쓰레기 차 옆에 쭈그리고 앉아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리고 몇일후 오랜만에 부모님 댁에 전화를 걸었는데 (인터넷은 그 집에 없었고 전화는 눈치보여서 쓰기 어려웠고 부모님도 이번에 가면 뼈를 묻을 각오를 하라고 하셨기에 감히 자주 걸수 없었습니다) 이틀내내 아무도 받질 않는것이었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아침, 걱정이 되어서 아버님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음성이 나오기 직전에 아버님이 받으셨습니다.

“아버지, 저예요. 왜 그렇게 전화를 안받으셨어요? 무슨 일 있어요?”

아버님이 한참을 말없이 전화를 들고 계시더니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을 했습니다.

“사실은 할아버지 돌아가셨다. 지금 발인을 막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다.”

이래뵈도 집안에서 장손입니다. 장손이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지켜드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저를 끔찍이도 아껴주셨던 할아버지셨는데.

왜 알려주지 않으셨느냐니까 아버지 대답이 더 기가 막혔습니다.

“그 와중에도 전가족 회의를 했다. 너를 부르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결론은 부르지 말자였다. 이유는 이번에 또 이렇게 들어와 버리면 네 인생 말 그대로 ‘조질것’ 같다는게 이유였다. 그래서 안 불렀다. 그렇게 알아라.”

참 비참했습니다. 정말 사는게 싫었습니다.

그때쯤 친척분께서 제안을 하나 해 오셨습니다.

학생비자는 비자인데 학교는 가지 않아도 되는 비자가 있다. 그 비자 받고 일만 열심히 몇 년 하면 여기서 영주권 받고 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일 자체에 지쳐 있었고 할아버지 돌아가신데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귀에 들어올리 없었고 한국에 가서 포장마차라도 해서 정말 제대로 다시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으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전에 처음 호주 갔다가 한국 갔을때는 식구들이 다 공항에 꽃다발 들고 나왔습니다.

두 번째 호주에서 실패하고 한국 들어 갔을때는 어머니 혼자 꽃한송이 들고 나오셨고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갔을때는 어머니 혼자서도 마지 못해 빈 손으로 나오신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물론 별반 달라진것 없이 저를 위해 누가 일자리 마련해서 기다리고 있는것은 아니었습니다.

나이어른 애들 틈에서 하는게 부끄럽긴 했지만 아뭏튼 어느 회사 서류 배달하는 일을 시작했고 몇 달 못되어 누군가의 소개로 다단계 업체를 알게 되어 다단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있으면서 그래도 공짜로 일한것은 아니어서 조금 모아갖고 들어온 돈, 다단계로 날렸습니다.

그리곤 다시 또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이름도 없는 작은 초등학생 보습학원의 교사로 들어갔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호주도 갔다왔고 미국도 좀 있었으면 영어선생님을 했어야 체면이 서는데 한문선생님 했습니다.

책에 나온 획 쓰는 순서와 다르다고 아이들에게 얼마나 망신을 당했었는지...

이름없는 작은 학원이어서 곧 망했고 거기서 나와야 했던 저는 이번엔 보험회사를 두드렸습니다.

신입사원 교육을 받던 한달동안 그래도 열심히 해서 최우수교육생 상까지 받고 시작했습니다.

유난히 저를 싫어하던 보험회사 윗 사람이 ‘최우수교육생 치고 실제로 제대로 하는 놈 못봤다’는 악담이 효력을 발휘했는데 저의 실적은 아주 엉망이었습니다.

다단계와 달리 열심히만 했으면 정당한 보수를 상당히 받을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개척 나가기 두렵고, 소개 해달라고 부탁하기 어색하고 상품 권할 용기 없다는 핑계로 열심히 하지 않다가 끝내는 빚만 지고 모든 것이 엉망이 된 채로 그곳에서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총체적으로 엉망이었습니다. 총체적 부실, 총체적 파산이었습니다.

그동안의 삶은 ‘차선’이 있었고 그 차선들로 늘 옮겨다니던 삶이었습니다.

이게 아니것 같으면 저것으로, 저게 아닌것 같으면 또 이것으로.

그런데 이번엔 그 ‘차선’이 없었습니다. 도피처가 더 이상 없더라는 말입니다.

어디 작은 돌부리라도 있어야 발을 옮길텐데 차올라오는 물을 피할 차선의 징검다리가 없었습니다.

갈데까지 간것이었고 그때쯤 되니까 자살을 진지하게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실행을 얼마 앞둔 어느날, 예전에 호주에서 다녔던 그 교회 목사님이 한국을 방문하시는데 한번 보자고 하셨습니다.

만나더니 앞뒤없이 대뜸 “너 사는거 어렵지?” 그러셨습니다.

그래도 은사인 분에게 현실을 그대로 말씀드릴수는 없어서 잘산다고 했는데도 부득불 그럴 리가 없다는 겁니다. 실제로 그랬구요.

그러더니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번 더 기회를 줄게. 호주로 와라. 와서 나 도와서 함께 일해봐라. 네게 마지막 기회가 될수 있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연락해.”

제겐 기적이었고 구세주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호주로 다시 오게 되었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글에서 제가 청년들을 섬기고 있다는 말은 제가 무슨 전도사님이나, 목사님같은 일을 한다는게 아니었고 교회 청소로, 봉고차 운전사로 일하며 청년들과 가깝게 지내며 그들에게 저의 지금까지 써내려온것과 같은 삶을 이야기 해주며 나는 이렇게 시간을 잘못 사용해서 인생을 낭비했으니 여러분은 그러지 마십사 하는 말을 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의지가 약하고 인생의 목적도 없고 게으르고 나태한 성향 탓이기도 하겠지만 이렇게까지 망가진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호주에서의 첫 10개월, 워홀 비자로 와서 정말 의미있게 시간을 사용했어야 할때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때의 여파가 그 이후 5년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고 지금 이순간까지도 영향을 미치며 사랑하는 저의 식구, 가족들에게까지 고통을 당하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한국을 떠나 외국에 나온다는 것은 언뜻 별것 아닌것 같은, 한순간의 경험정도로 치부될 수도 있지만 어떤면에서 그것은 모험을 넘어서서 도박을 벌인것이나 마찬가지일수 있습니다.

무언가 나아져서 돌아가지 않고서는 떠나기 전보다 더 못한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이유는 내가 그게 무엇이든 부족한것을 느꼈고 한국에서 잘 안풀렸기에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호주로 떠나오는 것인데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고서는 한국에 돌아가서도, 여기에 남아서도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하게 붕 떠버리는 상황에 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영어공부 절대하지 말라는 말도 정말 영어공부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호주 영어가 형편없다는 말도 아니었고 미국을 찬양하는 것도 아니었고, 호주에 오는 정말 이유는 왜 내가 한국에서 어려웠고 힘들었고 더 열심히 잘 살아보지 못했는가 깊이 돌아보면서 나의 약점, 나를 발목 잡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하는 그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치료하고 돌아가서 더 자신감을 얻어 열심히 살아갈수 있게 하는데에 있다는 말입니다.

한국사회는 너무 바빠서 나를 돌아볼, 깊이 성찰해 볼 시간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시간이 낭비갖고 그동안 달려 나가는것 같은 친구들을 돌아보면서 불안해 하기 때문에 그럴수가 없지만 일단 호주에 나오면 누가 재촉하는 것도 아니고 잔소리 하는 것도 아니고 해야만 하는것이 있는것도 아니기에 좀 더 자유롭게 자기자신에게 집중할수 있습니다.

그 소중한 기회를, 어쩌면 평생 한번밖에 없을수 있는, 잘 활용해서 나를 돌아보고 나의 부족한 점-실력이나 학력이 아닌-을, 약점을 명확히 바라보며 두 번째 글에서 설명했듯이 미쳐 보지 못했던 여러 가지 다양한 길들을 경험하는 것을 통해 치유하고 채우고 다지고 강하게 만든후 혹시라도 그런 와중에 내가 정말 가야할 길, 인생의 방향, 목적을 발견하게 되었다면 그곳으로 발을 옮겨 남은 삶을 의미있게 전력질주 할수 있는 그런 모든 것의 가능성으로 호주를 활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한국에 영어학원이 없어서가 아니었고 여기서 쓰고 가는 돈만큼 돈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호주가 별천지여서도 아닙니다.

내 근본적 문제를 돌아볼 시간도, 고칠 기회도 없었고 남들 뛰니까 나도 그냥 어리버리하게 뛰기만 뛰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며 살아왔던 삶이었기에 그랬던 것입니다.

‘나란 사람은 정말 어떤 사람인가’를 발견하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내가 태어난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고 ‘나의 가장 약한 점을 자신감과 경험등으로 보완’ 시킨다면 그 이후로 그 사람의 삶은 크게 달라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론입니다. 검증된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렇게 하지 못했고 아직 인생을 다 살아본게 아니기 때문에 효력이 있는건지, 정말 그렇게 되긴 하는지 알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게 정답이다. 이게 진짜다. 이게 길이다. 이대로만 하면 다 된다’는 식으로 ‘정답’을 제시하고 ‘해법’을 제시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지만 ‘이건 길이 아니더라. 이렇게 하면 안된다. 이것만큼은 피해야 한다’라는 것을 알려주고 표시해 주는것도 또 한가지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어느 누군가를 위해서 말입니다.

호주에 'Wrong way. Go back'이라는 표지판이 있습니다.

빨간색 큰 간판으로 보기도 흉물스럽고 ‘그걸 누가 몰라? 누가 그 길로 가야 바보야?’ 하는 표지판이지만 그게 없으면 큰 사고를 불러 일으킬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런 빨간 표지판이 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요즘 저는 생각을 바꿨습니다.

더 이상 내가 잘되어 보자고, 꼬인 인생을 풀어서 ‘성공’해보자고 생각하는 대신, 빨간 표지판이 되어서 ‘이 길은 아니다’라고 보여주어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조언해주고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말입니다.

제가 이끌어 줄수는 없습니다. 결국 저는 리더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제가 가본 길은 옳은 길들은 아니었기에 그 길로 이끌수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어딘가 한자리에 굳건히 서서 ‘Wrong way. Go back’하고 말해줄 수는 있겠지요.

이 글로 그런 마음으로, 호주로 오기전에 한번쯤 마음을 다시 다지고 목적을 확실하게 하고 오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쓰기로 한것입니다.

단 한명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전 만족합니다.

  
Comment '7'
  • 콩쥐 2006.07.18 08:13 (*.80.23.205)
    go back...빨랑 집으로 돌아가야쥐.....
    체험담은 하나같이 가슴으로 읽혀지네요.
  • 희주 2006.07.18 08:31 (*.104.24.48)
    저희 누나가 지금 아일랜드로 워킹홀리데이를 갔는데...이글을 보니 가슴에 찡하게 와닫는군요..
  • ? 2006.07.18 10:12 (*.243.220.126)
    의지박약한 분이군요...뭘 해도 끝까지 못 하실 분 같다는 생각이....
  • Jade 2006.07.18 11:13 (*.228.173.33)
    왜 이렇게 마음이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지는걸까요............
    후우~~~~~~

    저나 기성세대나 성인이 된 친구분들에게는 좋은 경험담이겠지만,
    정말이지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글이로군요........
    글의 내용이 나빠서가 아니라,
    인생의 큰 짐과 고행의 길을 맑게 자라야할 어린이들에게 보여주기에는
    너무나 힘든 우리내 인생길을 일찍 보여주는 것만 같아서요.......

    물론 고난의 여정을 미리 볼 수 있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겠지만,
    이미 시작 되버린 생존경쟁의 장에 서 있는 어린 아이들을 볼 때마다,
    마치 정글속 동물의 세계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어느 분의 글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제는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의 갈 길을 정했겠지요.......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린 인생의 미아는 정말 아무도 찾아 줄 수가 없을 터인데..........
    휴우~~~~................
  • 셀러브리티 2006.07.18 12:12 (*.165.248.96)
    외국의 교육과 문화, 외국생활 등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기대로 너무나 쉽게 현재 내가 가진 소중한 가치를 던져버렸는 사람이 아주 가까운 제 주변에도 있었습니다.
    떠나려는 그녀에게 지금 친구도, 애인도, 사랑도...그리 별다를 것도 없는 막연한 동경으로 던져버리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말해보세요...아마 이해도 수긍도 안하겠지만요.
    미지의 길은 미지일 때에만 매력적으로 비춰질 뿐이더라도, 사람들은 아마 계속 그 길을 걸어갈테죠.
  • 야맛있다 2006.07.18 13:54 (*.7.41.68)
    저는 이 글이 놀라운게 아니라 희주님이 남자라는 사실이 더 놀랍네요...
    그랬구나... ㅋㅋ
  • 침통허니 2006.07.18 14:48 (*.221.15.147)
    "깨달음"이 뭔지 상기시키는 좋은글 입니다.
    이글을 쓰신분은 이제 다양한경험으로 새로운삶의 지식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한사람이 사회구성원으로서 한평생 살아가는길은 무척다양하고 복잡하겠지요. 오직하면 역술이나 점성술이 기원전부터 발달했겠습니까?

    고등학교때 존경하던 수학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수학에서 정리, 정의, 공식,등의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기싫다면, 수학을 잘 할수있는방법은 오직하뿐이다.
    우리들은 귀를쫑긋 눈이 휘둥그레...
    "전국의 모든교과서와 참고서 문제의 답을 몽땅 외워라!"
    으아~ 발을구르고 책상을 치고 난리났었죠. 그때 저는 머리속을 휙 지나가는 뭔가를 느꼈고 그선생님덕분에 반에서 꼴찌를 맴돌던 저가 대학까지 진학 할 수 있었읍니다.

    다른사람들의 경험과 성공, 실패사례에서 내갈길을 찾지 못한다면 사람들의 인생은 무수한 시행착오와 미흡한 판단으로 혼란과 실패의 연속이 될 것입니다.

    "타인의 경험으로 깨닫는 사람은 현명하고 자기자신의 경험으로 깨닫는사람은 어리석다." -???-

    우리들은 "교육"에서 그것을 가장많이 얻을수 있을것입니다.
    교육은 "학식"보다는 "지혜"에 치중해야 하고
    학교 보다는 인간사회의 가장 기본단위인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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