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에서 150년전에 있었던 일이라네요.
이하 퍼온글 ---------
프랑스는 1852년 쿠테타로 등극한 나폴레옹 3세의 등극으로 제 2의 전성기를 누렸다.
1863년 살롱전 심사위원회는 5000점의 출품작 가운데 선택을 해야했고 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작품들이 낙선되었다. 마네, 피사로, 세잔을 포함하여 새로운 미술의 흐름을 주도하던 모든 젊은 화가들도 탈락하였다. 1863년의 살롱은 2년전 초창기의 마네가 참가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던 살롱전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낙선한 화가들은 그 심사위원회의 결정에 불복하여 항변했고, 여기에 언론이 개입하면서 황제는 입장표명의 해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결국 나폴레옹 3세는 일부 거절당한 작품들을 시찰하고 공식적인 살롱 옆에 별도로 마련된 공간에서 낙선자들을 전시하도록 지시했다. 거의 700점에 가까운 그림들이 '낙선자 전시회'로 명명된 이 전시회에 전시되었다. 공식 살롱전이 열린지 2주 후인 1863년 5월 15일 회전식 가로막대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낙선자 전시회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전시 첫날 이미 7,000명이 넘는 방문객이 이 '경악의 홀'(당시 명칭)을 방문했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은 특별히 따로 떨어진 홀에 걸려 있었는데, 이 그림의 좌우에는 마네의 '스페인 그림'인 <마호 복장의 청년>과 <투우사 복장의 빅토린 뫼랑>이 각각 걸려 있었다. <풀밭 위의 점심> 마치 자석처럼 관중들의 시선을 붙잡으며 파리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는 이 작품을 아주 '점잖지 못한' 작품으로 평했으며, 진보적인 비평가들조차도 이 그림에 대한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그때까지 '선한 사회'의 위선을 감히 어느 누구도 그러한 방식으로 조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네는 <풀밭 위의 점심>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그림 속의 깊은 공간으로 이어지는 삼각 구도로 구성한다. 삼각형의 기본 선은 실물 크기의 세 인물들이 이루는 평면적인 그룹의 바탕을 형성한다. 배경에는 '도시 속의 그룹'과는 확연이 모순되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목욕하는 여인이 있다. 마네는 그녀를 원근법에 따라 축소시켜 그리지 않았다.(그녀의 오른쪽에 있는 배에 비하면 훨씬 크다) 이는 하나의 의식적인 고풍적 표현으로, 그녀의 단순한 속옷과 같은 의상에도 드러난다. 이 작품속에 등장하는 도시인들은 자연 속에 앉아 있지만 그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뫼랑의 벗어 놓은 옷과 과일들로 이루어진 정물처럼, 그들은 무대와 같은 풍경 속에서 하나의 '그림 속의 그림'을 이루고 있다.
마네는 회화 양식 속에서 계속적인 단절을 시도한다. 정물과 나체는 단단하고 빈틈없이 잘 짜여져 있으며 극히 사실주의적이다. 그는 남자들을 거쳐 목욕하는 여인에 이르기까지 독특한 필치를 느슨하게 하여, 나무들과 배경 속에서 '인상주의적'으로 와해시킨다.
이 그림은 마네의 유품으로 1880년대에 오페라 가수인 포레가 구입한다. 그 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뒤랑 뤼엘의 화랑으로 팔린 후 한 수집가가 사들여 1906년에 루브르에 기증한다. 그리고 1986년에 이 그림은 오르세 미술관으로 옮겨진다.
때로는 사실주의 화가로, 때로는 인상주의 화가로 일컫어지는 마네는 어떠한 양식에도 편입시킬 수 없다. 새로운 미술을 개척한 인상주의자들과의 영향은 상호적이었지만, 그들의 전시회에는 참가하지 않는다. 마네는 회화에서 대도시인들을 주제화한 최초의 화가로서의 의미도 깊다. 그의 주제는 소외되고 개별화된 사람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