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헬프갓 연주회를 계기로 ... 예전에 좀 몰입했었던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음악이란 무엇일까요? 사람들에 따라 음악을 정의하는 방법이 무척 다양할 수는 있겠으나 ...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리"라고 하는 개념에 충실해서 음악을 정의하려고 할 것입니다. 음악 ... 혹은 "좋은 음악"이라 생각되는 "소리" 말입니다. 하지만 음악은 과연 "소리", 혹은 "음악이라 불릴만한 소리"일까요?
철학자들이 흔히 thought experiment라 부르는 것을 좀 해 보기로 하죠. 일단 "소리"는 "파동"에 대한 심리학적 해석의 결과입니다. 즉 물리적으로 "파동"의 형태로 존재하는 "에너지"를 우리 인간이 "소리"로 해석하는 것이죠.
첫번째 thought experiment. 가령 인간만큼 지적인 외계 생물체가 지구를 찾아왔는데 ... 이 생물체의 감각 기관은 매우 특별해서 물리적인 "파동" 혹은 음파를 피부에 느껴지는 진동으로 받아들입니다. 이 생물체에게 베토벤의 소나타는 "소리"로 들리지 않고, 몸의 떨림으로 느껴집니다. 이 생물체 앞에서 베토벤의 소나타를 연주한다면 ... 그 연주자는 "음악"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또 이 생물체는 "음악"을 듣고 있는 것일까요?
두번째 thought experiment. 수학자들이 말하는 "완전한 원"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듯이 ... 물리학에서 말하는 "완전한 진공"은 실험실에서도 만들 수 없다고 하지만 ... 이번에는 "완전한 진공의 실험실"을 만들어 그 안에 피아노 한 대, 피아니스트, 그리고 듣는 사람 한 명을 집어 넣어 보지요. 이제 피아니스트는 베토벤의 소나타를 연주합니다. 하지만, 완전한 진공의 실험실 안에서는 이 피아니스트의 에너지가 그냥 에너지로만 존재합니다. 파동조차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당연히 실험실 안의 감상자는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습니다. 이 실험실 안에는 과연 음악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이 피아니스트는 음악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위의 두 가지 thought experiments에 대해 ... 이런 경우 "음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면 음악을 소리로 정의하려는 일반적인 시도와 잘 맞아떨어지지만 ... (1) 어쩐지 음악에 대한 우리의 직관과 조금 맞지 않는 느낌이 들고, (2) 그렇다면 진공 공간에서 피아노를 치는 행위를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라는 새로운 문제 등이 제기될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결코 쉽지 않은 도전으로 저는 개인적으로 그리 좋은 선택이라 생각지 않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가설로 ... 위의 thought experiments의 경우에도 "여전히 음악은 존재한다"라고 말한다면 위 (1), (2) 등의 문제는 안 일어나지만 ... 반대로 음악을 소리로 정의하려는 일반적인 생각을 대폭 수정해야할 필요가 대두됩니다. 이것 역시 쉬운 문제는 아니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것이 좀 더 바람직한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두 번째 가설에 의하면 ... 그리고 제 생각으로는 ... 음악의 본질은 "그냥 에너지"입니다. 이 에너지를 쇼펜하우어는 "맹목적인 삶에의 의지"라 부를테고 ... 수님은 기쁨, 슬픔, 환희, 절망 등을 모두 포함하는 "감성"이라 부를 것 같고 ... 또 어떤 이들은 "상상력"이라 부를 것도 같은데 ... 어찌 되었건 그것은 에너지입니다. 이 에너지가 공기와 만나 파동을 만들어내고 ... 그 파동이 인간의 머리 속에서 소리로 해석되는 것은 ... 그런 에너지가 표현되는 한 가지 보편적인 방법일 뿐이지 ... 파동이나 소리가 음악의 본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음악의 본질은 그냥 에너지, 의지, 감성, 상상력 같은 것이죠. 청각을 완전히 상실한 음악가가 피아노를 치고 작곡을 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에너지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쇼펜하우어는 -- 이 사람 염세주의 만큼이나 탁월한 미학 이론으로 유명합니다 -- "음악을 의지의 가장 직접적이면서도 근원적인 형태"로 간주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충만한 에너지, 감성, 의지, 상상력을 갖는 것과 ... 그런 에너지를 파동과 소리의 형태로 표현하는 뛰어난 기량을 갖는 것은 ... 성공적인 음악가에게 모두 필요한 것이지만 두 개가 반드시 함께 발전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리 에너지, 상상력이 뛰어나도 ... 그 다양함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를 수도 있고, 대단히 뛰어난 기량으로 풍부한 표현력을 갖는 것 같아도 막상 에너지나 상상력은 뒤질 수도 있는 것이고 ... . 어제 헬프갓의 연주에는 에너지, 감성, 상상력의 홍수를 표현하는 방법이 무척 빈약했다는 아쉬움이 좀 남습니다.
음악적 감동은 ... 파동과 소리의 "표현"에서 얻는 것이 보통이지만 ... 때로 소리로 들리지 않는 에너지, 감성, 상상력에서도 찾아옵니다.
저는 며칠 전 짧은 글에서 "패러다임의 변화"를 주도하는 음악인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했는데 ... 패러다임의 변화는 결국 음악을 통해 표현하려는 바가 분명하고 강렬한 ... 에너지 넘치는 사람이 자신의 상상력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찾을 때 일어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튼 ... 음악의 본질은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만들어 내려는 의지"인 것 같습니다.
- JS
PS> 헬프갓이 연주한 라흐마니노프 3 번 협주곡 파일이 있는데 ... 악장별로 15 메가 쯤 됩니다. 이 정도 싸이즈 이곳에 안 올라가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