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못해] 익명에게 쓰는 글 - 당신은 정말 바보입니다

by 으니 posted Oct 05,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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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시아의 기막힌 해변가 어느 동굴에서, 오! 이런! 믿어지지않을만치 상태가 온전한 텍스트가 한 무더기 발견된다. 학자들은 그것을 읽은 후 두번 생각하지도 않고 "이것은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이야." 라고 결론내린다. 공부를 아무리 많이 한 학자라할지라도, 아무리 고전 텍스트에 능통하다하더라도 그들이 그저 "감"만으로 그렇게 자신있는 언술을 할 리가 없다.

조금은 구식이긴 하지만 텍스트분석이라는 나름의 체계가 있는 것이다. 언어라는 것은 인간의 사고가 내면화한 것이며 일생을 걸쳐온 습관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독특한 특징들이 나타나게 마련이고, 그것을 읽어내어 저자를 감별하는 방법은 사실 문학이라는 장르가 시작된 이래 있어온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오늘날 서양고전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낯선 것이 아니다. 로마공화정말기정치사상사를 공부하는 나에게도 역시 그렇다. 또한 이러한 방법은 고전시대의 텍스트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어떤 하나의 언어에 한정되어 쓰이는 방법론도 아니다. 정확히 문장만으로 저자를 밝혀낼 수 있다는 것이 안 믿어진다고?

1996년 1월 랜덤하우스에서 익명의 작가가 "삼원색"이라는 책을 펴내었다. 이 책에 대하여 "뉴욕"지는 배서대학 영문과의 돈 포스터 교수에게 저자가 누구인지 밝혀달라는 요청을 했고, 그는 언어분석방법을 통하여 이 작가가 뉴스위크지의 "조 클라인"이라는 것을 밝혀내었다. 조 클라인은 처음에는 부정했으나 몇달이 지난 후 저자라는 점을 시인했다. /"조 클라인"이라는/ 실명으로/ 발표된/ 그의/ 글들과/, 작품의/ 글은/ 동/일/인/의/ 것/으/로/ 분/석/되/었/던/ 것/이/다.

또 한가지 사례가 있다. 불과 몇년 전 있었던 "탄저균"테러는 협박편지와 탄저균을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는 흰 봉투에 넣어 주요 인사들에게 배달한 것으로 미국 전역을 그야말로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어버린 사건이었다. 실제로 이 테러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죽은 사람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의 상처를 많이 입었다. 우편시스템에, 아니, 정부에 불신이 생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떻게 같은 인간으로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인류에 대한 의심" 또한 그들은 겪어야만 했다.

돈 포스터 교수는 당국의 의뢰를 받아 다시 함께 배달된 협박편지의 내용을 분석한 후, 이것은 표면상의 내용대로 이슬람 과격 분자들의 소행이 아니라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미국인의 글이라는 가정을 세운다. 이후 그는 관련 인사들의 글을 분석하여 이것이 세균학자인 "스티븐 하트필"의 소행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오래 전 흙으로 돌아간 고전의 텍스트저자들은 죽었으니 말을 할 수 없고, 조 클라인은 시인했으나,  탄저균 테러자로 생각되는 "스티븐 하트필"은 기자회견을 열어 본인은 무죄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눈물을 글썽이고 목이 메어 그렇게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 물적인 증거가 없다는 점이었다.

물론 텍스트에 대한 언어분석방법이 반드시 저자감별에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글 전체의 진술과 부합하지 않는 부분진술, 혹은 허위진술, 과장진술같은 것들도 밝혀낼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언어적인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글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드러나는 그 사람의 모든 부분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익명으로 많은 이들을 불쾌하게 하는 당신, 익명이어도 숨길 수 없는 것은 많다.

자주 쓰는 단어, 단어들의 어미변화, 주어와 술어 목적어의 관계, 부사어의 위치, 문장간의 논리적 전개방법, 접속/연결어, 상용구,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넘어서서 저자가 인식하고 있는 기반, 그의 세상인식, 그리고 그가 주장하는 바, 즉, 그 텍스트의 내용은 결코 숨길 수가 없다.

그리고 더하여 혹 그런 것이 있다면, 당신의 "인격" 역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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