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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30 03:00
아르헨티나의 거장 Roberto Aussel 인터뷰 (1995년)
(*.149.24.169) 조회 수 4860 댓글 13
아래 내용은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기타음악과 클래식 음악 전반에 걸쳐 유익한 정보가 많았던 CNC에 있던 자료입니다. 그리고 저는 N-Free님의 홈페이지에서 갖고 왔습니다. 제 추측으로 이 글이 CNC에 올라온 것은 대략 5-6년 전쯤이 될 것 같은데, 그 이후로 아우쎌 선생님은 부산에서 공연을 하신 바 있고, 내년 3월에는 서울 호암아트홀의 공연과 마스터클라스(장소미정)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 글은 일본현대기타잡지와 1995년 있었던 인터뷰 글을 번역한 것이며(따라서 본문 내용에는 지금의 상황과는 약간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원자료글을 올리신 분은 신정하님일 것으로 생각되지만, 제가 굳이 허락받지 못하고 그냥 올립니다. 신정하님 보고 계셔도 너무 뭐라하진 마세요^^*
아앗.. 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시간내에 아우쎌 선생님과 최근 가진 인터뷰를 올리려 합니다. 천천히 서둘러서 할게요^^ 내년 공연 전까지는 합니당 --a
아르헨티나의 거장 Roberto Aussel 인터뷰 (1995년)
로베르토 아우셀은 아직 우리나라에서 공연이 이루어지지 않은 베일에 싸인 거장 중 한명입니다. 그는 1995년에 일본공연을 성황리에 끝내고 기타전문지 現代기타와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그 내용을 올립니다...
Q. 먼저 당신의 기타 경력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A. 1953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 라플라타에서 저는 태어났습니다. 소위 Porteno(항구의 아이들이라는 뜻, 수도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이니 우리식으로라면 "서울내기"정도랄까...?)라고 불리우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 아이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저도 어릴 적부터 축구, 기타 그리고 탱고를 자연스럽게 몸에 익히며 자라났습니다. 저의 양친은 모두 음악애호가였고, 저는 숙부에게서 처음 기타를 배우기 시작하였죠. 아버님은 어린 시절부터 마을 근처의 무도장에 저를 데려가 탱고를 가르쳐 주셨구요...이런 환경에서 저는 자연스럽게 기타를 익힐 수 있었습니다.
Q. 그럼 축구나 탱고도 잘 하시겠네요?
A. 조금 합니다만, 그리 잘하는 편은 아닙니다(웃음).
Q. 그럼 그 이후에 본격적으로 기타를 배우신 것은?
A. 7세경부터 근교의 음악원에서 수업을 시작했고, 그 이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후안 카스트로 음악원에서 호르헤 마르티네즈 자라테(우리나라에도 OLD 애호가들 사이에 폼포니오-자라테 부부 이중주단으로 알려져 있는 그 연주가임. 94년에 사망) 선생님을 사사하였고, 마리아 루이자 아니도(루이제 발커, 이다 프레스티와 더불어 너무나도 유명한 20세기 전반의 3대 여류 기타리스트의 한명, 그녀는 미구엘 료벳의 제자) 선생님에게도 사사를 받았습니다. 이 후 아르헨티나 국내의 모든 기타 콩쿨을 소년시절에 우승해 버렸습니다. 자라테 선생님은 그런 저를 너무나 자랑스러워 하셨는데, 이후 기타 콩쿨이 아닌 모든 고전 악기가 참가하는 기악콩쿨에서도 우승해 버리자 선생님은 기뻐서 눈물을 흘리며 저를 축복해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이 대회에서 우승했다는 사실보다는, 다른 악기와 경쟁하여 우수성을 입증받았다는 것과 또 그 주자가 제자인 저였다는 사실이 더 기쁘셨던 것이죠. 한마디로 자라테 선생님은 저의 기타 연주의 기초를 가르쳐 주신 은사입니다. 이 후 파리 콩쿨에 이르기까지 모든 저의 콩쿨 타이틀은 자라테 선생님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죠.
Q. 20년 전쯤부터 당신을 필두로 아르헨티나 출신의 우수한 기타리스트들이 다수 세계에 배출된 것은 자라테 선생의 우수한 지도 때문인 것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지역적인 문화의 특성과 풍토도 많이 작용햇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요.
A. 두가지 모두 상당히 중요한 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르헨티나에서 기타와 피아노는 매우 대중적인 악기로서, 많은 사람들이 즐겨 공부하고 연주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훌륭한 기타리스트와 피아니스트가 배출될 확률도 그만큼 높은 것이죠. 그리고 탱고에 사용되는 반도네온 역시 아르헨티나에서는 매우 대중속에 깊게 자리잡고 있지만, 반도네온은 연주가 무척 어려운 악기라는 점이 좀 다르죠. 두번째로 아르헨티나의 기타가 활성화되어 있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음악원의 지도, 교육 특히 연주면에서의 기술적인 교육이 매우 합리적이고 또 어렵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타의 역사를 잘 모르시는 분들은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어떻게 남미의 변방국인 아르헨티나가 유럽의 음악과 기타에 있어 그토록 강성할 수 있는가에 의문을 가지시겠지만, 거장 미구엘 료벳이 아르헨티나에 처음 기타를 전파하고, 아니도 등 다수의 걸출한 제자를 배출하여 그들에게 타레가 주법과 스페인 정통주법의 진수를 남겨주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러한 의문은 충분히 풀릴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세고비아 역시 전성기에 라플라타강 연안에 있는 우루구아이의 수도 몬테비데오에 자주 들러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서, 이 지역의 기타의 황금기의 역사는 이미 반세기가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하겠죠. 그 결과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활약하고 있는 아르헨티나, 우루구아이 기타리스트들의 토양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아르헨티나의 자라테, 우루구아이의 깔레바로를 필두로 하는 훌륭한 마에스트로들이 그들의 제자를 세계에 자랑스럽게 배출하고 있는데 이들의 문하에서 배출된 기타리스트들을 통칭 "라플라타 강 연안의 기타학파"라고 칭하죠.
Q.이제 제 2의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는 라플라타 기타학파라고 할 수 있는데...이제 화제를 다시 당신에게로 돌려 충격적인 당신의 데뷔에 대한 이야기를 좀 나눌까 하는데요. 역시 1975년의 파리 콩쿨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겠죠? 주최자인 비달씨도 그해의 콩쿨은 정말 인상적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고.
A. 그렇죠...저 뿐만 아니라 당시 아르헨티나의 젊은 기타리스트들에게 파리콩쿨은 특별한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지금은 아쉽게 이 콩쿨이 없어졌지만, 이전의 파리콩쿨은 우리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었죠. 그런 분위기에서, 우리가 콩쿨하면 파리콩쿨을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어느정도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고 봐야겠죠. 1975년에는 최종결선 출장자로서 아르헨티나와 우루구아이에서 가각 2명, 총 4명이 경연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Q. 1위는 당신, 로베르토 아우쎌-그리고 2위는 에두아르도 페르난데즈, 그 뒤를 이어 미구엘 앙헬 지로렛, 그리고 끝으로 발타자르 베니테즈였죠. 지금은 모두가 세계적인 기타리스트로 성장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들 4명에 덧붙여 1976년 우승자인 알바로 삐에리까지 통칭하여 "라플라타 기타학파"의 면면이 완성되었다고 보아도 되겠죠?
A. 그 무렵, 남미 기타계의 역사에 각인될만한 대규모의 기타 페스티발이 브라질의 포르토 알레그레에서 개최되었죠...
페스티발의 내용은 강습회와 국제콩쿨, 연주회 등 다양한 것이었는데 무려 4주간이나 계속되었죠. 이 페스티발에는 매년 남북미 대륙에 걸쳐 각국에서 거의 모든 기타리스트들이 참여하였습니다. 이 페스티발에서 저는 당신이 앞서 말한 파리콩쿨의 기타리스트들을 비롯한 여러 연주가들을 모두 만났고, 또 서로에게서 여러가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자라테 선생님도 강습차 이 페스티발에 오셨는데 여기서 선생님은 "야, 너 잠시 깔레바로의 클래스에서 좀 배우고 와"라고 하셨죠. 이정도로 그 페스티발은 우리에게 중요했고 또 자유로운 분위기였습니다.
Q. 그리고 파리콩쿨 이후 당신은 파리로 이주하셨죠?
A. 아니죠... 그 무렵, 저는 고국인 아르헨티나를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비달씨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파리에서 활동할 것을 권유하였지만, 저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2년 후, 다시 비달씨의 요청으로 연주회를 두번 가지게 되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 두번의 연주회 일정을 6개월 간격으로 잡은 것이었어요. 당시는 지금처럼 유럽과 남미간의 항공편이 원활하지 않았던 관계로 처음에는 연줄회를 한번 하고 귀국한 뒤 다시 출국할 예정이었는데 "뭐 항공편도 불편한데 이참에 파리에서 한 6개월 살아보지"한 것이 올해로 17년째를 살고 있죠(일동 웃음).
Q. 그 이후 유럽에서 줄곧 활동하신거죠?
A.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역시 프랑스 국내에서 주로 활동하였죠... 파리에 정착한 후의 첫 독주회는 제 첫 프랑스 제자가 개최해 주었죠.
이후 점차적으로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로 활동을 넓혀 나갔구요. 연주활동을 하는 동시에 음반취입도 병행하였는데 저에게 불운이었던 것은 당시가 LP시대의 말기였던지라 모두가 아날로그로 녹음이 되었다는 점이죠. 이들 녹음의 대다수가 CD로 복각되지 못해 사장된 점이 저로서도 안타깝습니다.
Q. 당신의 활동분야 중 현대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A. 파리콩쿨은 2년에 한번 정도 작곡콩쿨을 같이 열었죠. 그때 현대곡들의 초연자로서 제가 많이 초빙되었습니다. 본격적인 현대음악을 접한 것이 저로서도 그때가 처음이었구요. 이후 콩쿨의 연주를 통해 다양한 타잎의 현대곡을 접하게 되었죠. 많은 현대 작곡가들과의 교분도 생겼고...
Q. 일본에서 연주한 Constan의 "슬라브 悲歌"(그의 프랑스 음반인 Guitar+음반에 수록되어 있음)도 그들 작품군 중 하나인지요.
A. 그렇습니다. 단 이곡은 작곡부문의 콩쿨 경연곡이 아니라 국영 라디오프랑스의 위촉작품이었죠. 위촉곡을 작곡하기 전에 이미 콘스탄은 저를 헌정 및 초연자로 지목하였고, 먼저 제가 그의 자택을 방문하여 기타의 주법을 상세히 설명하였죠. 그 곡을 작곡할 무렵 콘스탄은 모스크바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왔을 때였는데, 그의 말을 빌리자면 모스크바에 머물던 시기에 러시아에서 들은 발라라아카와 러시아풍의 멜로디를 곡에 옮긴 것이 바로 이 "슬라브 悲歌"라고 합니다. 이 곡은 주제와 변주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초연후에 수년간 다시 연주할 기회를 갖지 못하다가 CD를 녹음하면서 레파토리에 추가하였죠. 물론 초연당시와 비교하면 곡의 해석은 상당히 바뀌었지만 여하튼 저는 콘스탄의 이 작품을 매우 좋아합니다.
Q. 작곡가 삐에르 불레즈와의 교분도 있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는 현대 작곡가의 거장으로 기타곡도 몇편 남기고 있는데 더이상 기타곡은 작곡할 계획이 없는지요. 또 그외 당신과 교분을 가지고 있는 중요한 작곡가들을 함께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A. 불레즈는 기타곡을 아직도 작곡하고 싶어합니다. 그와 처음 만난 것은 그가 주최한 음악제에 초빙되었을 때였죠. 그 음악제에서 독일의 작곡가 젠델의 작품을 초연하였는데, 그 이후 수차례 그 음악제에 참여하면서 교분이 깊어졌습니다. 저와 교분이 있는 인상깊은 현대 작곡가로서는 호세 루이스 캄파나, 다니엘 토시, 프란시스 끄레이냥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Q. 자, 화제를 바꾸어...먼저 쾰른 국립음대 교수 취임을 축하드립니다(95년부터 아우셀은 독일의 쾰른음대 교수로 재직하기 시작하였음).
A. 감사합니다. 저 자신도 쾰른 국립음대가 유럽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음대인 만큼 기대가 큽니다. 교수진도 작곡가 한스 베르너 헨쩨를 위시하여 당대일류급으로만 구성되어 있고 근무조건도 너무나 마음에 듭니다.
Q. 독일과 프랑스가 지리적으로 가까운만큼 이제 독일에서 활동하시게 되겠군요.
A. 그렇습니다. 최근의 저의 활동 역시 독일과 네덜란드 중심으로 행해졌던 바도 있고 해서 쾰른으로 이주할 생각입니다. 신학기가 시작되면 이주할 예정이구요. 처음에는 그다지 내키지 않았던 파리의 생활도 17년이라는 세월을 살다 보니 이제는 제 2의 고향이 된 느낌인데요... 프랑스 국적도 이미 취득하였고 아내도 프랑스 여자를 얻었고 아이도 여기서 자라고 있고... 스페인어권에서 살던 저 자신도 이제는 프랑스어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놀랍니다(웃음).
Q. 그런 좋은 조건으로 독일로 가시면서도 아직 프랑스에 미련이 남으시나보군요(웃음). 사실 파리음악원 교수직에 대한 이야기도 오고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A. 그랬었죠. 파리음악원의 알렉산더 라고야에서 전화가 와서 같이 식사나 하자고 하더군요. 식사자리에서 자신의 후임으로 저를 추천하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이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발표되었죠... 이 후 저는 산모르 국립음악원 교수로 취임하여 1년간 어린 학생들을 교육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저에게는 정말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쾰른 국립음대에서 기타과 교수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응시하게 되었죠.
Q. 파리는 교수임용에 있어 불투명한 점이 많습니다만 공개로 교수모집시험을 거쳐 교수를 선발하는 독일의 시스템은 매우 공정하다고 생각됩니다. 여하튼 제 생각으로는 프랑스 기타계가 당신을 독일로 빼앗긴 것은 큰 손실이라고 봅니다. 독일에서의 생활계획은 어떠하신지?
A. 먼저 대학강의는 년간 12인의 학생을 대상으로 합니다만 첫해는 6명으로 시작한다더군요. 쾰른 인근의 집을 구했고, 아들을 프랑스어학교에 입학시킬 예정입니다. 연주가로서의 생활은 큰 변화가 없겠지만, 앞으로는 연주가로서의 시간을 더 늘이지 않고 가족을 위한 시간을 늘일 생각입니다.
Q. 음반 이야기를 좀 할까요...당신의 CD는 벨기에의 GHA에서 출시되어 현재 일본 기타애호가 속으로도 상당히 침투(?)해 있는 상태입니다. 그 중에서 바이스, 북스테후데, 스카를랏티를 녹음한 바로크 앨범은 정말 대단한 평판을 받고 있습니다만.
A. 그래요? 감사합니다. 저는 전부터 바로크 음악을 녹음하려고 생각하고는 있었습니다만 최근 7년간은 사람들 앞에서만 연주했었죠. 물론 이 기간동안 바로크 양식과 프레이징 등 여러가지의 공부를 병행했습니다. 그 결과 7년전 제가 연주했던 바로크물과 이 음반은 상당히 다른 내용이 되었습니다... 제 견해로는 이전에 비해 훨씬 "본질"에 가까운 연주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 CD의 내용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만족하고 있구요. 녹음도 조용한 교외의 한 교회에서 낮시간을 피해 밤10시에서 다음날 새벽 1시까지 행하였죠. 저도 밤에 연주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고... GHA는 다음 CD의 녹음을 종용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저는 CD의 프로그램을 짜놓고 그 곡을 연습하는 식의 녹음을 무척 싫어합니다. 먼저, 연주회를 통해 청중들과의 살아있는 액션을 경험하면서 악곡연주의 질을 향상시켜 나가는 쪽을 선호하죠. 이 바로크 앨범도 미국순회연주에서 연주를 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GHA 이외에도, 미국의 레이블에서의 녹음도 고려중입니다.
Q. 이제 마에스트로 아스토르 삐아졸라와 당신의 관계를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A. 삐아졸라와 제가 처음 만난 것은 1981년, 파리에서였습니다. 당시 그는 저에게 연주를 청하여, 빌라-로보스의 작품을 연주해 주었죠.
당시 그는 기타 독주용 작품을 구상중이었지만, 저는 그가 나를 위하여 곡을 구상중이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후에도 파리를 방문할 때마다, 저를 만나곤 했죠. 그러더니, "5개의 탱고풍 소품"을 작곡하여 저에게 헌정해 주었습니다. "기타와 반도네온을 위한 협주곡"도 그는 저와 같이 즐겨 연주하였고,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되어버렸습니다.
Q. 그 작품이 당신에게 헌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당신의 교정판으로 출판되지 않았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A. 삐아졸라는 당시 스케쥴에 시달리는 바쁜 일정 관게로 출판을 서둘렀죠. 당시 저의 출판계약은 베르벤출판사와 계약이 되어 있었는데 그 악보의 계약은 파리의 앙리 르모와르와 체결되어 있었던 관계로 제가 교정을 보질 못했죠.
Q. 당신의 교정에 의한 삐아졸라의 "탱고의 역사"는 이제 고전이 된 느낌입니다만...원곡이 플룻과 기타를 위한 것이지만 여러가지 악기의 조합으로 연주되고 있는데요.
A. 그렇습니다. 저 역시 여러가지 악기와의 조합으로 이 곡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비올라로도 했었고 바이브라폰과도 연주했었고...이상적인 조합이라면 역시 반도네온과 기타와의 조합이 베스트가 아닐까 합니다.
Q. 이제 사용하시는 기타 이야기를 해 볼가 합니다만...당신의 기타라면 역시 프리드리히가 연상되는데요.
A. 프리드리히의 이야기 전에 먼저 여러분께 소개드리고 싶은 제작가가 있습니다. 먼저 제 기타편력을 말씀드리자면 어린시절 아르헨티나에서는 누녜스라는 양산기타를 사용했었죠. 어느날 사용하던 기타의 상태가 나빠 집 근처의 기타제작가를 수소문하여 방문하였는데 아직 어린아이였던 나는 혼자서 그 공방을 찾아갔죠. 우연히도 제가 찾아간 그 공방은 아르헨티나 최고의 제작가 에스트라다 고메즈의 공방이었습니다. 그는 어린아이였던 나에게도 정말 친절하게 대해 주었고, 기타에 대한 이런저런 어드바이스까지 해 주었습니다. 어린 나에게 프로 기타리스트로 진출할 것을 권유하였고, 그 이후에도 힘들때면 항상 그는 저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오늘날의 제가 있기까지 그의 은혜를 저는 잊지 못합니다. 물론 그와 나는 지금도 좋은 친구로서, 아르헨티나에 돌아갈 때마다 만나서 회포를 풀곤 합니다. 저의 콩쿨 타이틀은 모두 그의 기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프리드리히와의 인연은 파리시절부터입니다. 1977년 파리콩쿨의 작곡부문 연주 당시 제 연주 앞에 존 윌리암스의 연주가 계획되어 있었는데 당시 존은 플레타를 가져와 연주를 할 예정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비달씨가 "당신의 기타는 한대 뿐인것 같은데, 존의 플레타와 대적시켜 볼만한 기타가 한대 있으니 연주해 보지 않겠나?"라고 청했습니다. 저는 제 기타로 연주하고 싶었으나 비달의 부탁인지라 그 기타로 연주하였죠. 그 기타가 프리드리히였습니다.
Q. 호오...그런 일화가...궁금하군요. 어떻습니까? 프리드리히가 당시 존이 가져온 플레타에 필적하는 것이었나요?
A. 윌리암스의 연주가 갑자기 취소되어, 제가 급거 존의 연주회까지 연주해야 했습니다(일동 웃음). 그러나 저는 그 이후 프리드리히를 한대 주문했고 이때 제작된 기타는 매우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이 후 저는 프리드리히를 정기적으로 주문하고 있고, 계속 그의 기타로 연주하고 있습니다. 수년전에는 모리스 듀퐁이라는 제작가의 것도 연주한 적이 있죠.
Q. 모리스 듀퐁이라면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술로 유명한 꼬냑지방에 사는 제작가 아닌가요?
A. 그렇습니다. 그의 기타도 상당한 수준이죠. 현재 프랑스에서 주목받는 기타이죠.
Q. 프리드리히의 이야기를 좀 더 해주시죠.
A. 아시다시피 그는 이제 세계일급의 기타 제작가로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제가 그의 기타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기타는 항상 발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매한 음질뿐 아니라 연주가 쉬우며, 음량 또한 풍부하죠. 일반적으로 기타의 명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오래된 명기를 찾는 경향이 있는데 프리드리히에 한해서는 제 견해로는 신품을 권합니다. 제 경우에도 1977년작과 지금의 것은 많은 차이가 있어요.
Q. 이번 공연에서 사용한 것은 저먼 스프루즈 탑이었죠?
A. 그렇습니다. 저는 이제껏 몇개의 시더탑 프리드리히를 연주해 왔지만 시더탑으로는 표현하기 힘든 영역이 분명 있습니다. 특히 이번에 바로크 음악을 연주하면서 스프루즈의 필요성을 절감하였죠. 지금의 스프루즈 탑은 1992년 제작으로 제 마음에 정말 드는 모델입니다. 저는 이 악기에는 오거스틴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같이 사용하고 있는 시더탑에는 사바레즈현을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은 개인의 취향이니 각자에 맞는 현의 조합이 있겠죠.
Q. 연주회를 본 애호가들이 또한가지 놀란 점은 당신의 왼손에서 거의 잡음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는데요.
A. 아마 당신도 어느정도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깔레바로의 왼손 이동 메소드 덕분이죠. 포르토 알레그레 페스티발에서 아까 말씀드린 자라테 선생님께서 권한 깔레바로 클래스에서 배운 것입니다. 깔레바로의 이론은 왼손과 오른손의 테크닉, 자세 등에서 더할 나위없는 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완벽하지는 않죠. 왜냐하면 기타리스트 모두는 각자 체형이 달라 일률적인 적용이 어려운 부분이 있기 때문이죠.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훌륭한 이론의 취사선택, 어레인지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에 있어 가장 알맞는 테크닉을 추구하는 과정은 무엇보다도 지적인 능력을 요하는 작업입니다. 하나의 완벽한 테크닉 流派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한 선생에게서만 배운다는 것도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고딩시절 100m를 1 * 초대에 주파했던..
600석 매진 으니 전력 질주 올림!!!
아앗.. 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시간내에 아우쎌 선생님과 최근 가진 인터뷰를 올리려 합니다. 천천히 서둘러서 할게요^^ 내년 공연 전까지는 합니당 --a
아르헨티나의 거장 Roberto Aussel 인터뷰 (1995년)
로베르토 아우셀은 아직 우리나라에서 공연이 이루어지지 않은 베일에 싸인 거장 중 한명입니다. 그는 1995년에 일본공연을 성황리에 끝내고 기타전문지 現代기타와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그 내용을 올립니다...
Q. 먼저 당신의 기타 경력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A. 1953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 라플라타에서 저는 태어났습니다. 소위 Porteno(항구의 아이들이라는 뜻, 수도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이니 우리식으로라면 "서울내기"정도랄까...?)라고 불리우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 아이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저도 어릴 적부터 축구, 기타 그리고 탱고를 자연스럽게 몸에 익히며 자라났습니다. 저의 양친은 모두 음악애호가였고, 저는 숙부에게서 처음 기타를 배우기 시작하였죠. 아버님은 어린 시절부터 마을 근처의 무도장에 저를 데려가 탱고를 가르쳐 주셨구요...이런 환경에서 저는 자연스럽게 기타를 익힐 수 있었습니다.
Q. 그럼 축구나 탱고도 잘 하시겠네요?
A. 조금 합니다만, 그리 잘하는 편은 아닙니다(웃음).
Q. 그럼 그 이후에 본격적으로 기타를 배우신 것은?
A. 7세경부터 근교의 음악원에서 수업을 시작했고, 그 이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후안 카스트로 음악원에서 호르헤 마르티네즈 자라테(우리나라에도 OLD 애호가들 사이에 폼포니오-자라테 부부 이중주단으로 알려져 있는 그 연주가임. 94년에 사망) 선생님을 사사하였고, 마리아 루이자 아니도(루이제 발커, 이다 프레스티와 더불어 너무나도 유명한 20세기 전반의 3대 여류 기타리스트의 한명, 그녀는 미구엘 료벳의 제자) 선생님에게도 사사를 받았습니다. 이 후 아르헨티나 국내의 모든 기타 콩쿨을 소년시절에 우승해 버렸습니다. 자라테 선생님은 그런 저를 너무나 자랑스러워 하셨는데, 이후 기타 콩쿨이 아닌 모든 고전 악기가 참가하는 기악콩쿨에서도 우승해 버리자 선생님은 기뻐서 눈물을 흘리며 저를 축복해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이 대회에서 우승했다는 사실보다는, 다른 악기와 경쟁하여 우수성을 입증받았다는 것과 또 그 주자가 제자인 저였다는 사실이 더 기쁘셨던 것이죠. 한마디로 자라테 선생님은 저의 기타 연주의 기초를 가르쳐 주신 은사입니다. 이 후 파리 콩쿨에 이르기까지 모든 저의 콩쿨 타이틀은 자라테 선생님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죠.
Q. 20년 전쯤부터 당신을 필두로 아르헨티나 출신의 우수한 기타리스트들이 다수 세계에 배출된 것은 자라테 선생의 우수한 지도 때문인 것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지역적인 문화의 특성과 풍토도 많이 작용햇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요.
A. 두가지 모두 상당히 중요한 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르헨티나에서 기타와 피아노는 매우 대중적인 악기로서, 많은 사람들이 즐겨 공부하고 연주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훌륭한 기타리스트와 피아니스트가 배출될 확률도 그만큼 높은 것이죠. 그리고 탱고에 사용되는 반도네온 역시 아르헨티나에서는 매우 대중속에 깊게 자리잡고 있지만, 반도네온은 연주가 무척 어려운 악기라는 점이 좀 다르죠. 두번째로 아르헨티나의 기타가 활성화되어 있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음악원의 지도, 교육 특히 연주면에서의 기술적인 교육이 매우 합리적이고 또 어렵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타의 역사를 잘 모르시는 분들은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어떻게 남미의 변방국인 아르헨티나가 유럽의 음악과 기타에 있어 그토록 강성할 수 있는가에 의문을 가지시겠지만, 거장 미구엘 료벳이 아르헨티나에 처음 기타를 전파하고, 아니도 등 다수의 걸출한 제자를 배출하여 그들에게 타레가 주법과 스페인 정통주법의 진수를 남겨주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러한 의문은 충분히 풀릴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세고비아 역시 전성기에 라플라타강 연안에 있는 우루구아이의 수도 몬테비데오에 자주 들러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서, 이 지역의 기타의 황금기의 역사는 이미 반세기가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하겠죠. 그 결과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활약하고 있는 아르헨티나, 우루구아이 기타리스트들의 토양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아르헨티나의 자라테, 우루구아이의 깔레바로를 필두로 하는 훌륭한 마에스트로들이 그들의 제자를 세계에 자랑스럽게 배출하고 있는데 이들의 문하에서 배출된 기타리스트들을 통칭 "라플라타 강 연안의 기타학파"라고 칭하죠.
Q.이제 제 2의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는 라플라타 기타학파라고 할 수 있는데...이제 화제를 다시 당신에게로 돌려 충격적인 당신의 데뷔에 대한 이야기를 좀 나눌까 하는데요. 역시 1975년의 파리 콩쿨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겠죠? 주최자인 비달씨도 그해의 콩쿨은 정말 인상적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고.
A. 그렇죠...저 뿐만 아니라 당시 아르헨티나의 젊은 기타리스트들에게 파리콩쿨은 특별한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지금은 아쉽게 이 콩쿨이 없어졌지만, 이전의 파리콩쿨은 우리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었죠. 그런 분위기에서, 우리가 콩쿨하면 파리콩쿨을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어느정도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고 봐야겠죠. 1975년에는 최종결선 출장자로서 아르헨티나와 우루구아이에서 가각 2명, 총 4명이 경연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Q. 1위는 당신, 로베르토 아우쎌-그리고 2위는 에두아르도 페르난데즈, 그 뒤를 이어 미구엘 앙헬 지로렛, 그리고 끝으로 발타자르 베니테즈였죠. 지금은 모두가 세계적인 기타리스트로 성장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들 4명에 덧붙여 1976년 우승자인 알바로 삐에리까지 통칭하여 "라플라타 기타학파"의 면면이 완성되었다고 보아도 되겠죠?
A. 그 무렵, 남미 기타계의 역사에 각인될만한 대규모의 기타 페스티발이 브라질의 포르토 알레그레에서 개최되었죠...
페스티발의 내용은 강습회와 국제콩쿨, 연주회 등 다양한 것이었는데 무려 4주간이나 계속되었죠. 이 페스티발에는 매년 남북미 대륙에 걸쳐 각국에서 거의 모든 기타리스트들이 참여하였습니다. 이 페스티발에서 저는 당신이 앞서 말한 파리콩쿨의 기타리스트들을 비롯한 여러 연주가들을 모두 만났고, 또 서로에게서 여러가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자라테 선생님도 강습차 이 페스티발에 오셨는데 여기서 선생님은 "야, 너 잠시 깔레바로의 클래스에서 좀 배우고 와"라고 하셨죠. 이정도로 그 페스티발은 우리에게 중요했고 또 자유로운 분위기였습니다.
Q. 그리고 파리콩쿨 이후 당신은 파리로 이주하셨죠?
A. 아니죠... 그 무렵, 저는 고국인 아르헨티나를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비달씨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파리에서 활동할 것을 권유하였지만, 저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2년 후, 다시 비달씨의 요청으로 연주회를 두번 가지게 되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 두번의 연주회 일정을 6개월 간격으로 잡은 것이었어요. 당시는 지금처럼 유럽과 남미간의 항공편이 원활하지 않았던 관계로 처음에는 연줄회를 한번 하고 귀국한 뒤 다시 출국할 예정이었는데 "뭐 항공편도 불편한데 이참에 파리에서 한 6개월 살아보지"한 것이 올해로 17년째를 살고 있죠(일동 웃음).
Q. 그 이후 유럽에서 줄곧 활동하신거죠?
A.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역시 프랑스 국내에서 주로 활동하였죠... 파리에 정착한 후의 첫 독주회는 제 첫 프랑스 제자가 개최해 주었죠.
이후 점차적으로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로 활동을 넓혀 나갔구요. 연주활동을 하는 동시에 음반취입도 병행하였는데 저에게 불운이었던 것은 당시가 LP시대의 말기였던지라 모두가 아날로그로 녹음이 되었다는 점이죠. 이들 녹음의 대다수가 CD로 복각되지 못해 사장된 점이 저로서도 안타깝습니다.
Q. 당신의 활동분야 중 현대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A. 파리콩쿨은 2년에 한번 정도 작곡콩쿨을 같이 열었죠. 그때 현대곡들의 초연자로서 제가 많이 초빙되었습니다. 본격적인 현대음악을 접한 것이 저로서도 그때가 처음이었구요. 이후 콩쿨의 연주를 통해 다양한 타잎의 현대곡을 접하게 되었죠. 많은 현대 작곡가들과의 교분도 생겼고...
Q. 일본에서 연주한 Constan의 "슬라브 悲歌"(그의 프랑스 음반인 Guitar+음반에 수록되어 있음)도 그들 작품군 중 하나인지요.
A. 그렇습니다. 단 이곡은 작곡부문의 콩쿨 경연곡이 아니라 국영 라디오프랑스의 위촉작품이었죠. 위촉곡을 작곡하기 전에 이미 콘스탄은 저를 헌정 및 초연자로 지목하였고, 먼저 제가 그의 자택을 방문하여 기타의 주법을 상세히 설명하였죠. 그 곡을 작곡할 무렵 콘스탄은 모스크바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왔을 때였는데, 그의 말을 빌리자면 모스크바에 머물던 시기에 러시아에서 들은 발라라아카와 러시아풍의 멜로디를 곡에 옮긴 것이 바로 이 "슬라브 悲歌"라고 합니다. 이 곡은 주제와 변주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초연후에 수년간 다시 연주할 기회를 갖지 못하다가 CD를 녹음하면서 레파토리에 추가하였죠. 물론 초연당시와 비교하면 곡의 해석은 상당히 바뀌었지만 여하튼 저는 콘스탄의 이 작품을 매우 좋아합니다.
Q. 작곡가 삐에르 불레즈와의 교분도 있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는 현대 작곡가의 거장으로 기타곡도 몇편 남기고 있는데 더이상 기타곡은 작곡할 계획이 없는지요. 또 그외 당신과 교분을 가지고 있는 중요한 작곡가들을 함께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A. 불레즈는 기타곡을 아직도 작곡하고 싶어합니다. 그와 처음 만난 것은 그가 주최한 음악제에 초빙되었을 때였죠. 그 음악제에서 독일의 작곡가 젠델의 작품을 초연하였는데, 그 이후 수차례 그 음악제에 참여하면서 교분이 깊어졌습니다. 저와 교분이 있는 인상깊은 현대 작곡가로서는 호세 루이스 캄파나, 다니엘 토시, 프란시스 끄레이냥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Q. 자, 화제를 바꾸어...먼저 쾰른 국립음대 교수 취임을 축하드립니다(95년부터 아우셀은 독일의 쾰른음대 교수로 재직하기 시작하였음).
A. 감사합니다. 저 자신도 쾰른 국립음대가 유럽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음대인 만큼 기대가 큽니다. 교수진도 작곡가 한스 베르너 헨쩨를 위시하여 당대일류급으로만 구성되어 있고 근무조건도 너무나 마음에 듭니다.
Q. 독일과 프랑스가 지리적으로 가까운만큼 이제 독일에서 활동하시게 되겠군요.
A. 그렇습니다. 최근의 저의 활동 역시 독일과 네덜란드 중심으로 행해졌던 바도 있고 해서 쾰른으로 이주할 생각입니다. 신학기가 시작되면 이주할 예정이구요. 처음에는 그다지 내키지 않았던 파리의 생활도 17년이라는 세월을 살다 보니 이제는 제 2의 고향이 된 느낌인데요... 프랑스 국적도 이미 취득하였고 아내도 프랑스 여자를 얻었고 아이도 여기서 자라고 있고... 스페인어권에서 살던 저 자신도 이제는 프랑스어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놀랍니다(웃음).
Q. 그런 좋은 조건으로 독일로 가시면서도 아직 프랑스에 미련이 남으시나보군요(웃음). 사실 파리음악원 교수직에 대한 이야기도 오고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A. 그랬었죠. 파리음악원의 알렉산더 라고야에서 전화가 와서 같이 식사나 하자고 하더군요. 식사자리에서 자신의 후임으로 저를 추천하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이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발표되었죠... 이 후 저는 산모르 국립음악원 교수로 취임하여 1년간 어린 학생들을 교육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저에게는 정말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쾰른 국립음대에서 기타과 교수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응시하게 되었죠.
Q. 파리는 교수임용에 있어 불투명한 점이 많습니다만 공개로 교수모집시험을 거쳐 교수를 선발하는 독일의 시스템은 매우 공정하다고 생각됩니다. 여하튼 제 생각으로는 프랑스 기타계가 당신을 독일로 빼앗긴 것은 큰 손실이라고 봅니다. 독일에서의 생활계획은 어떠하신지?
A. 먼저 대학강의는 년간 12인의 학생을 대상으로 합니다만 첫해는 6명으로 시작한다더군요. 쾰른 인근의 집을 구했고, 아들을 프랑스어학교에 입학시킬 예정입니다. 연주가로서의 생활은 큰 변화가 없겠지만, 앞으로는 연주가로서의 시간을 더 늘이지 않고 가족을 위한 시간을 늘일 생각입니다.
Q. 음반 이야기를 좀 할까요...당신의 CD는 벨기에의 GHA에서 출시되어 현재 일본 기타애호가 속으로도 상당히 침투(?)해 있는 상태입니다. 그 중에서 바이스, 북스테후데, 스카를랏티를 녹음한 바로크 앨범은 정말 대단한 평판을 받고 있습니다만.
A. 그래요? 감사합니다. 저는 전부터 바로크 음악을 녹음하려고 생각하고는 있었습니다만 최근 7년간은 사람들 앞에서만 연주했었죠. 물론 이 기간동안 바로크 양식과 프레이징 등 여러가지의 공부를 병행했습니다. 그 결과 7년전 제가 연주했던 바로크물과 이 음반은 상당히 다른 내용이 되었습니다... 제 견해로는 이전에 비해 훨씬 "본질"에 가까운 연주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 CD의 내용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만족하고 있구요. 녹음도 조용한 교외의 한 교회에서 낮시간을 피해 밤10시에서 다음날 새벽 1시까지 행하였죠. 저도 밤에 연주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고... GHA는 다음 CD의 녹음을 종용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저는 CD의 프로그램을 짜놓고 그 곡을 연습하는 식의 녹음을 무척 싫어합니다. 먼저, 연주회를 통해 청중들과의 살아있는 액션을 경험하면서 악곡연주의 질을 향상시켜 나가는 쪽을 선호하죠. 이 바로크 앨범도 미국순회연주에서 연주를 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GHA 이외에도, 미국의 레이블에서의 녹음도 고려중입니다.
Q. 이제 마에스트로 아스토르 삐아졸라와 당신의 관계를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A. 삐아졸라와 제가 처음 만난 것은 1981년, 파리에서였습니다. 당시 그는 저에게 연주를 청하여, 빌라-로보스의 작품을 연주해 주었죠.
당시 그는 기타 독주용 작품을 구상중이었지만, 저는 그가 나를 위하여 곡을 구상중이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후에도 파리를 방문할 때마다, 저를 만나곤 했죠. 그러더니, "5개의 탱고풍 소품"을 작곡하여 저에게 헌정해 주었습니다. "기타와 반도네온을 위한 협주곡"도 그는 저와 같이 즐겨 연주하였고,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되어버렸습니다.
Q. 그 작품이 당신에게 헌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당신의 교정판으로 출판되지 않았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A. 삐아졸라는 당시 스케쥴에 시달리는 바쁜 일정 관게로 출판을 서둘렀죠. 당시 저의 출판계약은 베르벤출판사와 계약이 되어 있었는데 그 악보의 계약은 파리의 앙리 르모와르와 체결되어 있었던 관계로 제가 교정을 보질 못했죠.
Q. 당신의 교정에 의한 삐아졸라의 "탱고의 역사"는 이제 고전이 된 느낌입니다만...원곡이 플룻과 기타를 위한 것이지만 여러가지 악기의 조합으로 연주되고 있는데요.
A. 그렇습니다. 저 역시 여러가지 악기와의 조합으로 이 곡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비올라로도 했었고 바이브라폰과도 연주했었고...이상적인 조합이라면 역시 반도네온과 기타와의 조합이 베스트가 아닐까 합니다.
Q. 이제 사용하시는 기타 이야기를 해 볼가 합니다만...당신의 기타라면 역시 프리드리히가 연상되는데요.
A. 프리드리히의 이야기 전에 먼저 여러분께 소개드리고 싶은 제작가가 있습니다. 먼저 제 기타편력을 말씀드리자면 어린시절 아르헨티나에서는 누녜스라는 양산기타를 사용했었죠. 어느날 사용하던 기타의 상태가 나빠 집 근처의 기타제작가를 수소문하여 방문하였는데 아직 어린아이였던 나는 혼자서 그 공방을 찾아갔죠. 우연히도 제가 찾아간 그 공방은 아르헨티나 최고의 제작가 에스트라다 고메즈의 공방이었습니다. 그는 어린아이였던 나에게도 정말 친절하게 대해 주었고, 기타에 대한 이런저런 어드바이스까지 해 주었습니다. 어린 나에게 프로 기타리스트로 진출할 것을 권유하였고, 그 이후에도 힘들때면 항상 그는 저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오늘날의 제가 있기까지 그의 은혜를 저는 잊지 못합니다. 물론 그와 나는 지금도 좋은 친구로서, 아르헨티나에 돌아갈 때마다 만나서 회포를 풀곤 합니다. 저의 콩쿨 타이틀은 모두 그의 기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프리드리히와의 인연은 파리시절부터입니다. 1977년 파리콩쿨의 작곡부문 연주 당시 제 연주 앞에 존 윌리암스의 연주가 계획되어 있었는데 당시 존은 플레타를 가져와 연주를 할 예정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비달씨가 "당신의 기타는 한대 뿐인것 같은데, 존의 플레타와 대적시켜 볼만한 기타가 한대 있으니 연주해 보지 않겠나?"라고 청했습니다. 저는 제 기타로 연주하고 싶었으나 비달의 부탁인지라 그 기타로 연주하였죠. 그 기타가 프리드리히였습니다.
Q. 호오...그런 일화가...궁금하군요. 어떻습니까? 프리드리히가 당시 존이 가져온 플레타에 필적하는 것이었나요?
A. 윌리암스의 연주가 갑자기 취소되어, 제가 급거 존의 연주회까지 연주해야 했습니다(일동 웃음). 그러나 저는 그 이후 프리드리히를 한대 주문했고 이때 제작된 기타는 매우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이 후 저는 프리드리히를 정기적으로 주문하고 있고, 계속 그의 기타로 연주하고 있습니다. 수년전에는 모리스 듀퐁이라는 제작가의 것도 연주한 적이 있죠.
Q. 모리스 듀퐁이라면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술로 유명한 꼬냑지방에 사는 제작가 아닌가요?
A. 그렇습니다. 그의 기타도 상당한 수준이죠. 현재 프랑스에서 주목받는 기타이죠.
Q. 프리드리히의 이야기를 좀 더 해주시죠.
A. 아시다시피 그는 이제 세계일급의 기타 제작가로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제가 그의 기타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기타는 항상 발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매한 음질뿐 아니라 연주가 쉬우며, 음량 또한 풍부하죠. 일반적으로 기타의 명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오래된 명기를 찾는 경향이 있는데 프리드리히에 한해서는 제 견해로는 신품을 권합니다. 제 경우에도 1977년작과 지금의 것은 많은 차이가 있어요.
Q. 이번 공연에서 사용한 것은 저먼 스프루즈 탑이었죠?
A. 그렇습니다. 저는 이제껏 몇개의 시더탑 프리드리히를 연주해 왔지만 시더탑으로는 표현하기 힘든 영역이 분명 있습니다. 특히 이번에 바로크 음악을 연주하면서 스프루즈의 필요성을 절감하였죠. 지금의 스프루즈 탑은 1992년 제작으로 제 마음에 정말 드는 모델입니다. 저는 이 악기에는 오거스틴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같이 사용하고 있는 시더탑에는 사바레즈현을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은 개인의 취향이니 각자에 맞는 현의 조합이 있겠죠.
Q. 연주회를 본 애호가들이 또한가지 놀란 점은 당신의 왼손에서 거의 잡음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는데요.
A. 아마 당신도 어느정도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깔레바로의 왼손 이동 메소드 덕분이죠. 포르토 알레그레 페스티발에서 아까 말씀드린 자라테 선생님께서 권한 깔레바로 클래스에서 배운 것입니다. 깔레바로의 이론은 왼손과 오른손의 테크닉, 자세 등에서 더할 나위없는 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완벽하지는 않죠. 왜냐하면 기타리스트 모두는 각자 체형이 달라 일률적인 적용이 어려운 부분이 있기 때문이죠.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훌륭한 이론의 취사선택, 어레인지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에 있어 가장 알맞는 테크닉을 추구하는 과정은 무엇보다도 지적인 능력을 요하는 작업입니다. 하나의 완벽한 테크닉 流派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한 선생에게서만 배운다는 것도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고딩시절 100m를 1 * 초대에 주파했던..
600석 매진 으니 전력 질주 올림!!!
Comment '13'
-
이후 점차적으로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로 활동을 넓혀 나갔구요. 연주활동을 하는 동시에 음반취입도 병행하였는데 저에게 불운이었던 것은 당시가 LP시대의 말기였던지라 모두가 아날로그로 녹음이 되었다는 점이죠. 이들 녹음의 대다수가 CD로 복각되지 못해 사장된 점이 저로서도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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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분... 눈이 번쩍 뜨이네요... 복각을 기대해봐도 되겠죠? 흠... -
이런 잼있는 사실이 있었다니.. ㅎㅎㅎ
이번 프랑스 여행때 빠리에서 아우쎌님과 한나절을 보냈는데염..저에게 메냐칭구분들께 드리는 선물이라고 2개의 테잎을 건내주시더군요..
하나는 1985년 네덜렌드 암스텔담 기타 축제 실황..
여기에 바로 이 인터뷰에서 말한 곡들이 대다수군요..
콘스탄의 "슬라브" 호세루이스 깜빠나의 "넥수스" 등등..
그리고 다른 카세트엔
빠리의 "성 에띠앙 두 몽뜨" 성당에서 삐아졸라와 "기타와 반도네온을 위한 협주곡" 실황이 들어있네여..
뒷면엔 "땅고의 역사" 란곡이..
칭구분들껜 죄송합니다만..제가 먼저 다 들어봤어염..ㅠㅠ;; 빨랑올릴께염..
암스텔 실황테이프는 비교적 녹음이 잘되있구염.. 연주는..ㅠㅠ;; 놀라울따름이죠..특히 호세 루이스 깜빠나의 "넥수스"를 듣곤 몇일 다른음악 못들었어염..
그리고 삐아졸라와의 실황은 아우쎌님 친구분께서 그냥 테이프 리코더로 녹음했다더군요.. 음질은 많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오케스트라와 반도네옴 의 음량때문에 야마하 기타에 짹 꼽구 연주하셨다는..^^;; 그래도 자료적 가버치는 충분하다고 애지중지 하셨습니다..
이테잎을 저에게 주신 이유는 제가 메냐 칭구분들께 몇곡 들려드리고 싶다고 음반으로 발매되지않은 비공식 녹음좀 주실수 있냐고 했더니 주셨는데..이리 귀중한걸줄이야..버거버걱..
글고 전 다음주말까진 머리털빠지게 바빠염.. 으니님 넘 고생해주셔서 넘 감사드려염~~^^ -
앗..그리고욤 혹시 카세트 테입을 어떻게 해야 컴터로 옮겨서 올릴수있을까여?
제가 카세트에서 엠디로는 옮겨봤는데 음질이 형편없이 떨어지던데염.. 엠디에서 컴터론 할쭐아는데..카세트 플레이어도 좀 오래되긴했는데 아직 잘 돌아가는 캔우드인데..ㅜㅜ;; -
혁님... 카세트의 앰프의 입력단자와 연결되는 단자(즉 카세트에서 음이 나오는 단자)
와 컴퓨터의 라인인 단자와 연결한 후
제트오디오로 녹음하시면 됩니다.
케이블 가격은 한국돈으로 이천원.... (가급적 금도금으로 사셔요) -
아우셀도 아우셀이지만,
인터뷰를 한 기자의 지식과 사전 준비는 정말 치밀하군요...
울나라에 아우셀이 왔을 떄 과연 누가 저 정도의 인터뷰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답이 안나옴...ㅡㅡ; (더 훌륭한 인터뷰를 하실 분이 있음 좋구요~) -
더 훌륭한 인터뷰 부들부들 부들부들 --;;
-
나이스 플레이스님 감사합니다~^^
집에 굴러다니는 은도금이 있어서 해바써염..
근데 그냥 워크멘에서 뽑아서 했다는..ㅡㅡ;;(왜 그생각을 못했을까..@@) -
난 에스트라다 고메즈 최고 모댈 한대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고메즈 일화를 들을줄은 몰랐군요^^
-
다시 읽어도 잼다.
인터뷰기자도 역시 중요하군요.... -
기자가 인터뷰를 한 것이 아니랍니다.
카마다 요시아키라고...
실력있는 일본의 프랑스 유학파 중견 기타리스트가 인터뷰를 직접 했습니다. -
그리고 한동안 운영을 쉬었던 www.cnc.or.kr은 1년 전부터 다시 조용히 운영되고 있습니다.
재오픈 뒤에도 원래 취지대로 여전히 기타코너를 통해 일반 고전음악 애호가를 대상으로 클래식 기타 음악을 알리고 있습니다. -
미니압바 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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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연주가는 절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군요...
이 글을 읽고나니 지난 번 하루 차이로 연주회를
놓친 게 너무 아깝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