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2003.08.03 00:15
★★★잃어버린 역사, 보여지는 흔적(펌)★★★
(*.190.147.218) 조회 수 5461 댓글 14
잃어버린 역사 보여지는 흔적
최근에 발행된 양서의 내용을 요약했습니다. - 다물도인-
학교와 집에서 한글, 한자, 영어를 배운지가 40여년이 넘었으나 역사문헌에서는 문자로 해석되지 않는 의문점이 상당수 있었다.
첫째, 우리 선조(동이)들은 역사상 가장 먼저 문명(황화,홍단 문명)을 일으켰고, 고구려가 말 탈때의 등자(발걸이)를 발명함으로서 기마부대 전술을 비약적으로 변화시켰으며, 신라가 대궁, 나침반, 고려가 인쇄술·도자기, 이조에서는 의학대백과사전, 철갑선, 측우기 등을 세계에서 선두로 개발한 선진국이었다.
둘째, 3국시대 때 이미 다연발 쇠뇌, 1,000보 이상 날라 가는 활을 개발(당나라는 500보)하였을 정도로 무기가 우수하였을 뿐 아니라 적을 제압해도 재물과 여자를 약탈하지 않는 군자국(君子國)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춘추 시대 까지만 해도 적이 쓰러지면 두번 찌르지 않았고 머리가 희거나 나이 많은 포로는 돌려보낼 정도였다. 그러나 서쪽과 중앙아세아 쪽의 야만인들이 중원대륙에 들어오면서 전투에서 비인도적인 살륙이 감행되기 시작하였다.
셋째, 현재 지구상에서 긴 역사를 자랑하거나 첨단 무기로 세계를 재패하려는 강대국들 중에 전통악기가 제대로 보존된 나라가 없다. 우린 악학궤범에 전통악기가 무려 65개에 이르고 있다. 이집트, 인도가 뛰어난 전통음악을 갖고 있으나 악기는 불과 10개 미만이다. 핵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들은 더욱이나 적다. 여러 사람들이 더불어 즐겁게 살기 위한 악기개발은 무기개발 보다 훨씬 문명적이고 인간적이며 신의 뜻에 따라 생명의 축복을 같이 누릴 수 있다..
넷째, 한민족은 오랜 기간 지게 사용, 씨름, 아기 업기 등으로 척추가 가장 튼튼하고 탄력이 있어 어떠한 기후, 토양에도 적응력이 무척 강하다. 음식도 거의 발효식품이어서 음식 자체가 약이라고 할 정도로 건강생활이 보편화되어 있다.
다섯째, 인류학적으로 볼 때 한민족은 어깨넓이에 비해 가장 두상(頭狀)이 크고 귀에서 머리 꼭대기까지의 높이가 가장 크다. 이것은 몸체에 비해 뇌의 용적량이 가장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럽 외인부대에서 한국인이 고난도의 전투, 작전을 가장 많이 담당하고 돈도 제일 많이 받는 게 이러한 이유에 기인할 것이다. 8.15해방 직전 미군측(OSS)에서 일본군 후방침투 목적으로 한국인과 중국인들을 같이 특수훈련을 시켰는데 마지막 단계까지 중국인들은 5%밖에 통과 못하였으나, 한국인(광복군)들은 95%가 무사히 종료한 통계가 있다. 미국 사회에서는 유태인도 이민와서 부두 노동자로 출발하면 3대째 가서야 명문대를 졸업하거나, 최고의 직업을 가질수 있으나 한국인은 당대나 늦어도 2대째 목표를 다 이루는 것을 숱하게 보게 된다.
이상의 특질과 장점을 고려하면, 분명 한민족은 세계에서 위상이 더 높고 어디가도 대우받는 민족이 되어야 할 것이나, 현재는 주변강국의 견제를 받음은 물론 한반도에서 분단상태로 움추러 있고 내부적으로도 찌들어 있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 아프리카, 아랍의 유색인종과 아메리카 인디언만큼 혹독한 시련과 피해를 입으며 피난살이 하듯이 이 조그만 땅에 축소되어 있을까? 서구 열강의 도움으로 앞서 산업화를 이룬 일제가 한일합방후 가장 먼저 한 일은 한민족의 역사서 20여 만권을 탈취 소각한 만행이었다. 이 만행도 인간이 저지른 만큼 헛점이 있어 우리가 노력만 한다면 그 허점 사이로 진실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진실의 흔적을 찾기 위해 젊음을 바치고 있는 역사학자이자 애국자이신 아래 선생님들께 우러러 깊이 감사를 드린다.
*`한국의 학자들은 학력이 매우 낮아 일본이 왜곡한 역사를 검증할능력이 없다`고 대만의 평론가 고분유(黃文雄)가 지적(조선일보 2001.4.23 P2)했을 정도이나 뜻있는 분들이 혼신을 기울여 노력중
o 천문학에 의한 근거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
- 신라, 백제, 고구려 3국의 일식, 월식, 성좌, 혜성 등을 총망라하여 최신 과학적 기법으로 역산한 결과 천문대, 관측소의 위치는 신라는 양자강 유역, 백제는 발해만 유역, 고구려는 만주지역으로 나타났다.
o 기상자료에 의한 조사(전 기상청 근무 정용석 선생)
- 신라, 백제, 고구려의 1천년에 가까운 기상자료(홍수, 가뭄, 폭설, 서리, 한발 등)를 비교하면 3국이 일치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한반도 내 3국이 있었다면 같은 태풍권이라 기상이 유사하였을 것이다. 특이하게도 3국은 하늘을 뒤덮는 메뚜기 떼에 농작물이 피해를 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o 시·문학류 등 고전을 통한 분석 (한학자, 문인 김종윤 선생)
* 조선 성종에서 시작하여 숙종 대에 걸쳐 완성했을 정도로 방대한 동문선(東文選)에 신라, 고려, 조선의 명사들이 남긴 시, 여행문, 소감 등 명문이 게재되어 있다. 이 내용에서 역사의 진실을 찾는 것이다.
- 이규보의 시에는 "송악산 깊은 골에 원숭이들이 뛰놀고 있다"고 표현
- 권근의 역대제왕 혼일강리도지(歷代帝王 混一强理圖誌)서문에는 "천하는 넓다. 안으로 중국과 밖으로 사해가 있어 몇천만리가 되는지 알 수가 없다."
* 중국 : 로마 교황청 처럼 황제가 계신곳, 국호가 아님.
- 하륜의 시중에 수원(水原)이 나오는데 세종실록지리지의 해설에 의하면 하도 호수와 강들이 많아 수주(水州)로 불려지기도 했다. 배만 타는 군인이 405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 경기도 수원에 해군 400여명이 배치될 정도의 물이 있을까? 그러나 대륙의 호북성에는 호수와 강들로 가득한 같은 지명의 수원이 있다.
- 변계량의 소문에 정릉(태조 이성계 신덕왕후)을 언급하였는데 태종실록에는 이성계가 죽자 사을한곡으로 이장하였다가 다시 공현으로 이장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 두 지명은 모두 대륙의 하남성에 있다.
o 전쟁사를 통해 본 고증(해군대학 교수, 충무공전문가 최두환)
- 조선의 경국대전에는 유배 형량으로 서울에서 2,000∼3,000리로 귀양 보내게 되어 있고 왕조실록에는 5,000리까지 귀양을 보냈다. 한반도는 남북 합쳐도 2,000리에 불과하다.
- 왜 현 중원 대륙의 지명과 한반도의 지명이 같은게 너무 많을까? 마치 한반도는 대륙의 바둑판처럼 지명이 거의 같다.
* 일본이 토지조사와 척식사업시 새로 붙인 지명이라고 판단
- 왜 중시조 묘들은 한반도에 보이나 원시조 묘들은 찾아보기 어려울까? 족보에는 대다수가 대륙에 있는 것으로 표기된 집안이 많지 않는 가?
- 삼국유사에서 최치원은 "신라전성기시 경주는 17만8936호, 1360개의 마을, 성 둘레는 55리, 큰 부자집은 35채 이다"고 언급하였다. 지금2~3층 건물을 허용해도 경주의 경우는 인구15만에 불과하다. 구당서지리지에는 "낙양이 19만4796호, 인구 118만3903명, 성 둘레55리"로 표기되어 그 유사성에 놀랠 따름이다.
- 1902~1903년 서울에 거주했던 이태리 총영사 Carl Rossetti는 그의 저서(한국과 한국인)에서 Corea는 Cor=heart 심장, 핵심으로 천하의 중심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고려가 가올이 즉 "가운데 사는 사람" 이란 뜻과 같다. 그는 이태리 중간 지식인들이 Corea의 위치를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한국이 반도국가이고 황해와 동해(일본해)사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우스꽝스럽다(ridicolo)고 자조하였다.
- 임진왜란 발발후 에스파니아 선교사 Cespedes는 꼬라이와 중국을 가로질러 큰강이 흐르는데 강폭이 3레구아(16.67키로)라 하였고 다른 선교사 Luis Frois는 "10레구아(55.67키로)에 달하는 큰강을 중심으로 꼬라이와 중국이 나누어져 있으며 꼬라이를 지나려면 가기 어려운 큰 사막이 있다"고 기록에 남겼다.
*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신라 북쪽에는 큰사막이 있다고 지적
- 허준(1546~1615)의 동의보감에는 "서북에는 땅이 높고 메마르나 동남쪽의 양광(兩廣)에는 산은 높고 물은 나쁘고 땅이 습하며 봄, 가을 이외는 안개의 독에 씌어서 한열이 번갈아 일어난다"고 지적
* 양광은 광동과 광서로 맨 남쪽지방, 한반도 서북은 낮은 지대로
맞지 않음
- 하멜 표류기(1662)에는"조선 땅에 도착하여 야자수 차를 얻어 마셨고 뱀, 독성있는 짐승들이 많고 강에는 다양한 크기의 악어들이 있었다"고 언급. 앵무새와 공작도 있었다고 부언
- 고려 성종12년 거란의 소손령이 떠나면서 서희 장군에게 낙타10마리, 말100필 등을 선사.
- 고려 현종2년 양규 장군이 7차례 거란군과 싸웠고 거란군은 철수도중 고려군의 습격과 폭우를 만나 말과 낙타들이 모두 쓰러짐
- 고려 태조25년 거란이 낙타50마리를 선물로 보냈으나 발해를 멸망시켰다고 만부교 아래 매어 두고 아사시킴.
* 신라, 고려, 조선의 영토는 낙타가 생존 활동했던 지역을 포함
- 삼국사 신라본기에 보면 말갈족이 단독으로 신라에 자주 침입한다. 신라 국경이 고구려 영역을 거치지 않고 말갈족과 닿는다면 한반도의 신라는 아님.
-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 병부에서 올린 7가지 진술 보고서 : 상해와 등려를 입구로, 진강을 길목으로 삼고 지원군을 철수하지 말아야 한다고 간원
* 양자강 입구의 강소성에 있는 진강과 상해를 호칭
* 양자강 하구(55km) 인접지역에도 부산, 동래 지명이 있음.
o 1897년 이전까지는 외국문헌에 "The Korea"로 합중국 개념인 정관사 The가 국명에 붙어 있었으나 한반도 Korea가 되면서 The가 빠짐.
* 백암 박은식(1859∼1925)이 제목을 조선통사(朝鮮痛史)로 아픔의 역사로 발간
- 심지어 혹자는 서울의 덕수궁, 창덕궁 등 궁전을 가보라고도 한다. 아무리 전란에 불타 새로 지었다 하나 구들이나 빼치카 등 사람이 산 흔적이 없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이방자 여사가 말년에 거처한 낙선제 한옥에는 구들도 부엌도 있다. 모두가 헐리우드 스타일로 급조하지 않았느냐는 의문이다.
* 조선인들의 구국운동을 체념토록 하기 위해 일제가 조작한지는 알 수 없으나 계룡산 연천봉 꼭대기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방백마각(方百馬角)에 구혹화생(口或禾生)
이태조가 건국한 1392년에다 방백마각 즉 482년(4x100+80午+2角)을 더하는 해(1874년)에 나라(國)가 이동(移)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아뭏튼 우리는 인종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뛰어난 장점과 능력을 갖고 있는 민족이다. 비록 근세사에 일본과 열강에 의해 찢어지는 아픔을 겪지만 이제는 그 아픔을 상쇄할 그 이상의 영광을 되찾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망치게 한 최대의 단점인 시기심과 분파성을 버려야 한다. 남 잘되는 것을 싫어하고, 우수한 사람을 끄집어 내리려는 심보로는 결코 선조들의 영광을 되찾기 어렵다. 인정과 의리, 콩도 쪼개어서 나우어 먹는다는 동족의식이 절실할 때이다.
제갈량의 심서나 진수의 삼국지에는 우리 민족의 장단점을 정확히 보고 있다. "어떻게 하든 동이족들과는 정면 대결을 피하고, 위 사람들은 어지럽히고 아래 사람들은 분열토록 해서 치고 들어가면 반드시 이긴다"고 강조한다.
현재 세계에서 양대 세력으로 자웅을 겨루는 유태와 중국 객가(客家)는 그저 생겨난 민족이 아니다.
유태계는 외부적으로는 무자비하게 독선적이면서도 내부적인 디아스포라 내규는 눈물겹고도 엄숙하다.
'만약 유태인이 노예로 팔릴 때는 아버지보다는 스승을 먼저 구해야 한다.' '유태인이 노예로 팔려 왔을 때는 가장 가까운 이웃에 사는 동족이 7년 이내 환속을 시켜야 한다.' '유태혈통의 고아가 발견될 시에는 그 지역의 가까운 유태인들이 별도의 돈을 모아 키워주고 교육시켜야 한다.'
만약 이를 어기게 되면 살고 있는 현지국가의 실정법이 아닌 유태그룹 자체 내규에 의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역대 중원에 군림했던 황제의 70%가 북방 기마민족 출신임에도 이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항쟁한 객가(客家)들의 단결력과 신뢰는 대단하다. 손문, 등소평, 이광요, 이등휘, 이붕 등 현 중국과 화교의 실세는 모두 객가에 속한다. 객가는 도박을 않는다. 또 하도 기마민족에게 많이 당해 말을 무척 싫어한다. 항상 남자들의 희생에 대비하여 여자들을 매우 강인하게 교육시킨다. 그래서 객가의 여자들은 전족도 하지 않았다. 개가 야위면 주인의 수치라고 가까운 식구는 반드시 챙긴다. 그들에겐 백견(百見)이 불여일행(不如一行)이다. 그만큼 말보다 실천을 중시한다.
한민족의 운명은 앞으로 미국을 움직이는 유태와 중국을 움직이는 객가와의 영향력에서 결정될지도 모른다. 그 두 민족은 자기들끼리는 억대 이상을 거래해도 영수증이 없다. 신뢰가 생명이고 불신 받을 때는 생명을 내놓을 준비를 해야한다.
한반도에서 아직 기아에 시달리는 주민들이 있고 매년 고아들이 대량 해외로 입양되는 아픔이 있음에도 지도층이 여위지 않고 여유있는 자들에게 안겨지는 수입 애완견이 1년에 20여 만마리나 된다고 하니 우린 이런 핏줄의식 갖고는 민족운명을 새로이 개척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유태계와 객가에 뒤지지 않을 민족혼이 살아 있어야 한다.
상층부는 통찰력을 키워야 하고 내부적으로는 단결력을 키워야 한다. 다시는 열강의 제물이 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중심세력으로 세계사에진면목을 발휘하고자 한다면 나아가 세계의 진정한 평화를 선도하려 한다면 역사를 깊이 탐구하는 데서 시작하여 한민족이 인류 최고의 모범민족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인간다운 길인가를 세계만방에 보여 주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근에 발행된 양서의 내용을 요약했습니다. - 다물도인-
학교와 집에서 한글, 한자, 영어를 배운지가 40여년이 넘었으나 역사문헌에서는 문자로 해석되지 않는 의문점이 상당수 있었다.
첫째, 우리 선조(동이)들은 역사상 가장 먼저 문명(황화,홍단 문명)을 일으켰고, 고구려가 말 탈때의 등자(발걸이)를 발명함으로서 기마부대 전술을 비약적으로 변화시켰으며, 신라가 대궁, 나침반, 고려가 인쇄술·도자기, 이조에서는 의학대백과사전, 철갑선, 측우기 등을 세계에서 선두로 개발한 선진국이었다.
둘째, 3국시대 때 이미 다연발 쇠뇌, 1,000보 이상 날라 가는 활을 개발(당나라는 500보)하였을 정도로 무기가 우수하였을 뿐 아니라 적을 제압해도 재물과 여자를 약탈하지 않는 군자국(君子國)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춘추 시대 까지만 해도 적이 쓰러지면 두번 찌르지 않았고 머리가 희거나 나이 많은 포로는 돌려보낼 정도였다. 그러나 서쪽과 중앙아세아 쪽의 야만인들이 중원대륙에 들어오면서 전투에서 비인도적인 살륙이 감행되기 시작하였다.
셋째, 현재 지구상에서 긴 역사를 자랑하거나 첨단 무기로 세계를 재패하려는 강대국들 중에 전통악기가 제대로 보존된 나라가 없다. 우린 악학궤범에 전통악기가 무려 65개에 이르고 있다. 이집트, 인도가 뛰어난 전통음악을 갖고 있으나 악기는 불과 10개 미만이다. 핵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들은 더욱이나 적다. 여러 사람들이 더불어 즐겁게 살기 위한 악기개발은 무기개발 보다 훨씬 문명적이고 인간적이며 신의 뜻에 따라 생명의 축복을 같이 누릴 수 있다..
넷째, 한민족은 오랜 기간 지게 사용, 씨름, 아기 업기 등으로 척추가 가장 튼튼하고 탄력이 있어 어떠한 기후, 토양에도 적응력이 무척 강하다. 음식도 거의 발효식품이어서 음식 자체가 약이라고 할 정도로 건강생활이 보편화되어 있다.
다섯째, 인류학적으로 볼 때 한민족은 어깨넓이에 비해 가장 두상(頭狀)이 크고 귀에서 머리 꼭대기까지의 높이가 가장 크다. 이것은 몸체에 비해 뇌의 용적량이 가장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럽 외인부대에서 한국인이 고난도의 전투, 작전을 가장 많이 담당하고 돈도 제일 많이 받는 게 이러한 이유에 기인할 것이다. 8.15해방 직전 미군측(OSS)에서 일본군 후방침투 목적으로 한국인과 중국인들을 같이 특수훈련을 시켰는데 마지막 단계까지 중국인들은 5%밖에 통과 못하였으나, 한국인(광복군)들은 95%가 무사히 종료한 통계가 있다. 미국 사회에서는 유태인도 이민와서 부두 노동자로 출발하면 3대째 가서야 명문대를 졸업하거나, 최고의 직업을 가질수 있으나 한국인은 당대나 늦어도 2대째 목표를 다 이루는 것을 숱하게 보게 된다.
이상의 특질과 장점을 고려하면, 분명 한민족은 세계에서 위상이 더 높고 어디가도 대우받는 민족이 되어야 할 것이나, 현재는 주변강국의 견제를 받음은 물론 한반도에서 분단상태로 움추러 있고 내부적으로도 찌들어 있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 아프리카, 아랍의 유색인종과 아메리카 인디언만큼 혹독한 시련과 피해를 입으며 피난살이 하듯이 이 조그만 땅에 축소되어 있을까? 서구 열강의 도움으로 앞서 산업화를 이룬 일제가 한일합방후 가장 먼저 한 일은 한민족의 역사서 20여 만권을 탈취 소각한 만행이었다. 이 만행도 인간이 저지른 만큼 헛점이 있어 우리가 노력만 한다면 그 허점 사이로 진실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진실의 흔적을 찾기 위해 젊음을 바치고 있는 역사학자이자 애국자이신 아래 선생님들께 우러러 깊이 감사를 드린다.
*`한국의 학자들은 학력이 매우 낮아 일본이 왜곡한 역사를 검증할능력이 없다`고 대만의 평론가 고분유(黃文雄)가 지적(조선일보 2001.4.23 P2)했을 정도이나 뜻있는 분들이 혼신을 기울여 노력중
o 천문학에 의한 근거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
- 신라, 백제, 고구려 3국의 일식, 월식, 성좌, 혜성 등을 총망라하여 최신 과학적 기법으로 역산한 결과 천문대, 관측소의 위치는 신라는 양자강 유역, 백제는 발해만 유역, 고구려는 만주지역으로 나타났다.
o 기상자료에 의한 조사(전 기상청 근무 정용석 선생)
- 신라, 백제, 고구려의 1천년에 가까운 기상자료(홍수, 가뭄, 폭설, 서리, 한발 등)를 비교하면 3국이 일치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한반도 내 3국이 있었다면 같은 태풍권이라 기상이 유사하였을 것이다. 특이하게도 3국은 하늘을 뒤덮는 메뚜기 떼에 농작물이 피해를 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o 시·문학류 등 고전을 통한 분석 (한학자, 문인 김종윤 선생)
* 조선 성종에서 시작하여 숙종 대에 걸쳐 완성했을 정도로 방대한 동문선(東文選)에 신라, 고려, 조선의 명사들이 남긴 시, 여행문, 소감 등 명문이 게재되어 있다. 이 내용에서 역사의 진실을 찾는 것이다.
- 이규보의 시에는 "송악산 깊은 골에 원숭이들이 뛰놀고 있다"고 표현
- 권근의 역대제왕 혼일강리도지(歷代帝王 混一强理圖誌)서문에는 "천하는 넓다. 안으로 중국과 밖으로 사해가 있어 몇천만리가 되는지 알 수가 없다."
* 중국 : 로마 교황청 처럼 황제가 계신곳, 국호가 아님.
- 하륜의 시중에 수원(水原)이 나오는데 세종실록지리지의 해설에 의하면 하도 호수와 강들이 많아 수주(水州)로 불려지기도 했다. 배만 타는 군인이 405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 경기도 수원에 해군 400여명이 배치될 정도의 물이 있을까? 그러나 대륙의 호북성에는 호수와 강들로 가득한 같은 지명의 수원이 있다.
- 변계량의 소문에 정릉(태조 이성계 신덕왕후)을 언급하였는데 태종실록에는 이성계가 죽자 사을한곡으로 이장하였다가 다시 공현으로 이장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 두 지명은 모두 대륙의 하남성에 있다.
o 전쟁사를 통해 본 고증(해군대학 교수, 충무공전문가 최두환)
- 조선의 경국대전에는 유배 형량으로 서울에서 2,000∼3,000리로 귀양 보내게 되어 있고 왕조실록에는 5,000리까지 귀양을 보냈다. 한반도는 남북 합쳐도 2,000리에 불과하다.
- 왜 현 중원 대륙의 지명과 한반도의 지명이 같은게 너무 많을까? 마치 한반도는 대륙의 바둑판처럼 지명이 거의 같다.
* 일본이 토지조사와 척식사업시 새로 붙인 지명이라고 판단
- 왜 중시조 묘들은 한반도에 보이나 원시조 묘들은 찾아보기 어려울까? 족보에는 대다수가 대륙에 있는 것으로 표기된 집안이 많지 않는 가?
- 삼국유사에서 최치원은 "신라전성기시 경주는 17만8936호, 1360개의 마을, 성 둘레는 55리, 큰 부자집은 35채 이다"고 언급하였다. 지금2~3층 건물을 허용해도 경주의 경우는 인구15만에 불과하다. 구당서지리지에는 "낙양이 19만4796호, 인구 118만3903명, 성 둘레55리"로 표기되어 그 유사성에 놀랠 따름이다.
- 1902~1903년 서울에 거주했던 이태리 총영사 Carl Rossetti는 그의 저서(한국과 한국인)에서 Corea는 Cor=heart 심장, 핵심으로 천하의 중심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고려가 가올이 즉 "가운데 사는 사람" 이란 뜻과 같다. 그는 이태리 중간 지식인들이 Corea의 위치를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한국이 반도국가이고 황해와 동해(일본해)사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우스꽝스럽다(ridicolo)고 자조하였다.
- 임진왜란 발발후 에스파니아 선교사 Cespedes는 꼬라이와 중국을 가로질러 큰강이 흐르는데 강폭이 3레구아(16.67키로)라 하였고 다른 선교사 Luis Frois는 "10레구아(55.67키로)에 달하는 큰강을 중심으로 꼬라이와 중국이 나누어져 있으며 꼬라이를 지나려면 가기 어려운 큰 사막이 있다"고 기록에 남겼다.
*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신라 북쪽에는 큰사막이 있다고 지적
- 허준(1546~1615)의 동의보감에는 "서북에는 땅이 높고 메마르나 동남쪽의 양광(兩廣)에는 산은 높고 물은 나쁘고 땅이 습하며 봄, 가을 이외는 안개의 독에 씌어서 한열이 번갈아 일어난다"고 지적
* 양광은 광동과 광서로 맨 남쪽지방, 한반도 서북은 낮은 지대로
맞지 않음
- 하멜 표류기(1662)에는"조선 땅에 도착하여 야자수 차를 얻어 마셨고 뱀, 독성있는 짐승들이 많고 강에는 다양한 크기의 악어들이 있었다"고 언급. 앵무새와 공작도 있었다고 부언
- 고려 성종12년 거란의 소손령이 떠나면서 서희 장군에게 낙타10마리, 말100필 등을 선사.
- 고려 현종2년 양규 장군이 7차례 거란군과 싸웠고 거란군은 철수도중 고려군의 습격과 폭우를 만나 말과 낙타들이 모두 쓰러짐
- 고려 태조25년 거란이 낙타50마리를 선물로 보냈으나 발해를 멸망시켰다고 만부교 아래 매어 두고 아사시킴.
* 신라, 고려, 조선의 영토는 낙타가 생존 활동했던 지역을 포함
- 삼국사 신라본기에 보면 말갈족이 단독으로 신라에 자주 침입한다. 신라 국경이 고구려 영역을 거치지 않고 말갈족과 닿는다면 한반도의 신라는 아님.
-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 병부에서 올린 7가지 진술 보고서 : 상해와 등려를 입구로, 진강을 길목으로 삼고 지원군을 철수하지 말아야 한다고 간원
* 양자강 입구의 강소성에 있는 진강과 상해를 호칭
* 양자강 하구(55km) 인접지역에도 부산, 동래 지명이 있음.
o 1897년 이전까지는 외국문헌에 "The Korea"로 합중국 개념인 정관사 The가 국명에 붙어 있었으나 한반도 Korea가 되면서 The가 빠짐.
* 백암 박은식(1859∼1925)이 제목을 조선통사(朝鮮痛史)로 아픔의 역사로 발간
- 심지어 혹자는 서울의 덕수궁, 창덕궁 등 궁전을 가보라고도 한다. 아무리 전란에 불타 새로 지었다 하나 구들이나 빼치카 등 사람이 산 흔적이 없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이방자 여사가 말년에 거처한 낙선제 한옥에는 구들도 부엌도 있다. 모두가 헐리우드 스타일로 급조하지 않았느냐는 의문이다.
* 조선인들의 구국운동을 체념토록 하기 위해 일제가 조작한지는 알 수 없으나 계룡산 연천봉 꼭대기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방백마각(方百馬角)에 구혹화생(口或禾生)
이태조가 건국한 1392년에다 방백마각 즉 482년(4x100+80午+2角)을 더하는 해(1874년)에 나라(國)가 이동(移)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아뭏튼 우리는 인종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뛰어난 장점과 능력을 갖고 있는 민족이다. 비록 근세사에 일본과 열강에 의해 찢어지는 아픔을 겪지만 이제는 그 아픔을 상쇄할 그 이상의 영광을 되찾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망치게 한 최대의 단점인 시기심과 분파성을 버려야 한다. 남 잘되는 것을 싫어하고, 우수한 사람을 끄집어 내리려는 심보로는 결코 선조들의 영광을 되찾기 어렵다. 인정과 의리, 콩도 쪼개어서 나우어 먹는다는 동족의식이 절실할 때이다.
제갈량의 심서나 진수의 삼국지에는 우리 민족의 장단점을 정확히 보고 있다. "어떻게 하든 동이족들과는 정면 대결을 피하고, 위 사람들은 어지럽히고 아래 사람들은 분열토록 해서 치고 들어가면 반드시 이긴다"고 강조한다.
현재 세계에서 양대 세력으로 자웅을 겨루는 유태와 중국 객가(客家)는 그저 생겨난 민족이 아니다.
유태계는 외부적으로는 무자비하게 독선적이면서도 내부적인 디아스포라 내규는 눈물겹고도 엄숙하다.
'만약 유태인이 노예로 팔릴 때는 아버지보다는 스승을 먼저 구해야 한다.' '유태인이 노예로 팔려 왔을 때는 가장 가까운 이웃에 사는 동족이 7년 이내 환속을 시켜야 한다.' '유태혈통의 고아가 발견될 시에는 그 지역의 가까운 유태인들이 별도의 돈을 모아 키워주고 교육시켜야 한다.'
만약 이를 어기게 되면 살고 있는 현지국가의 실정법이 아닌 유태그룹 자체 내규에 의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역대 중원에 군림했던 황제의 70%가 북방 기마민족 출신임에도 이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항쟁한 객가(客家)들의 단결력과 신뢰는 대단하다. 손문, 등소평, 이광요, 이등휘, 이붕 등 현 중국과 화교의 실세는 모두 객가에 속한다. 객가는 도박을 않는다. 또 하도 기마민족에게 많이 당해 말을 무척 싫어한다. 항상 남자들의 희생에 대비하여 여자들을 매우 강인하게 교육시킨다. 그래서 객가의 여자들은 전족도 하지 않았다. 개가 야위면 주인의 수치라고 가까운 식구는 반드시 챙긴다. 그들에겐 백견(百見)이 불여일행(不如一行)이다. 그만큼 말보다 실천을 중시한다.
한민족의 운명은 앞으로 미국을 움직이는 유태와 중국을 움직이는 객가와의 영향력에서 결정될지도 모른다. 그 두 민족은 자기들끼리는 억대 이상을 거래해도 영수증이 없다. 신뢰가 생명이고 불신 받을 때는 생명을 내놓을 준비를 해야한다.
한반도에서 아직 기아에 시달리는 주민들이 있고 매년 고아들이 대량 해외로 입양되는 아픔이 있음에도 지도층이 여위지 않고 여유있는 자들에게 안겨지는 수입 애완견이 1년에 20여 만마리나 된다고 하니 우린 이런 핏줄의식 갖고는 민족운명을 새로이 개척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유태계와 객가에 뒤지지 않을 민족혼이 살아 있어야 한다.
상층부는 통찰력을 키워야 하고 내부적으로는 단결력을 키워야 한다. 다시는 열강의 제물이 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중심세력으로 세계사에진면목을 발휘하고자 한다면 나아가 세계의 진정한 평화를 선도하려 한다면 역사를 깊이 탐구하는 데서 시작하여 한민족이 인류 최고의 모범민족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인간다운 길인가를 세계만방에 보여 주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Comment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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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할만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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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서 긴 역사를 자랑하거나 첨단 무기로 세계를 재패하려는 강대국들 중에 전통악기가 제대로 보존된 나라가 없다. 우린 악학궤범에 전통악기가 무려 65개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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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중국)연주가 집단후원좀 한다기로서니 도데체 뭐가불만인지`란 생각의 차이는 도데체 얼마나 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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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대한 좋은정보...도움이 많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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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책 보면 자꾸 낙타선물해오는데 왜 하필 낙타일까하고 의아해했는데.. 생각해보니 좀 이상하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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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님이 역사에도 관심을... 별표를 세개씪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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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님 눈치가 보통이 아니신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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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적 자존을 지키고 함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나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지 않늘 때 맹목적인 국수주의로 빠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과거 일본과 독일이 그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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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도 주목할 만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지만 일제 강점기에 민족적 자존을 함양하기 위해 쓰여진 위서(僞書)로 밝혀진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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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만들러 감 =3=3=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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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는 위서다 아니다 하는 논쟁에서 벗어나 그 자체를 사료사학적으로 살펴볼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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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위와같은 견해에는 부작용도 상당히 뒤따른다고 생각하여 우려하고 있으나 여러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끼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견해 또한 나름의 의미와 맥락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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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는 논란의 소지가 많으나 그 뜻만은 이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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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븅신같은 개소리들이 통용되는(?) 수준이 끝날때 진전한 선진국으로 거듭날것같슴다. 원 별...무지한건지 정신분열인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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