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토론과 교통순경

by gmland posted May 15,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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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통순경

  옛날에 교통 신호기가 없던 시절에는, 네거리 한복판에 통을 갖다 놓고는, 교통순경이 올라가서 수신호로써 차량을 정리했었지요. 어쩌다 여순경이 올라오면, 인기절정이었지요. 지금도 가끔 평양 네거리에서 볼 수 있는 향수어린 풍경입니다.

  비평문화가 발달 되지 못하면, 그 사회는 고인 물처럼 썩고 맙니다. 이건 사회학자들의 일반적 견해입니다. 우리 기타매니아도 수준 있는 기타문화 사이트입니다. 당연히 비평문화가 발달해야 한다고 봅니다. 선진국의 비평과 토론은 대개 이런 과정으로 진행되는 것 같습디다.

* 비평의 주체와 객체에는 성역이 없어야 한다.

  비평의 주체와 객체에는 성역이 없어야, 선진 문화국이라 합디다. 이건 또 민주와 자유라는 천부인권에 부합하는 당위적 귀결입니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는 사회성과 항상 이웃하고 있고, 공유집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 개념이 충돌하면 사회성이 우선합니다. 개인의 자유는 무한대는 아니지요. 내재적 한계를 가집니다. 사회성에 저촉되면 제한됩니다.

  또한, 비평과 토론은, 도덕과 윤리와도 이웃합니다. 역시 공유집합을 가집니다. 실정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 합니다. 법과 윤리는 같은 실체이지만, 법은 사회질서의 유지를 위하여, 윤리의 범위 중에서 최소한의 것만 강제력으로 제한한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나 법이 규제하지 못하는 대상이, 윤리로서, 예의라는 이름으로 엄연히 존재합니다. 비평과 토론에서는 가장 중요한 덕목일 것입니다.

  비평과 토론에는 여러 가지 필수 구성요소가 있겠지요. 우선 양 당사자가 필요합니다. 예컨대, 어떤 비평가가, - 아마든 프로든 애호가든, 누구든지 비판하면 비평가입니다. - 어떤 연주인이나 작곡가의 작품을 비판을 했다. 비판 대상은 국내든 국외든 관계없어야 하겠지요. 이때, 비평가는 최대한의 연구를 통해서, 자기 논리를 증명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만일 아니라면, 이건 비평으로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예외적으로, 그냥 재미로 한다는 것도 통하겠지만, 이때는 상대방에게 피해가 없는 경우로만 극도로 제한됩니다.

* 조국과 국익은 비평에서 감안될 수도 있다.

  국내 연주가나 창작품이 비평의 대상이라면, 좀 더 신중할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대개 민족주의자들이 이 범주에 속하겠지요. 이라크 전에서, 미국의 저명한 기자가 미국에 치우친 편파적 보도를 일삼고, 반대론자들이 공정성이 없음을 비판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언론인이기 이전에 미국인이다. 나는 조국의 국익을 먼저 생각한다.”라고요. 이 경우에는, 비평의 원칙을 이탈한 것이므로, 순수 논리상으로는 옳다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만, 그렇다고 그 사람을 제압할만한 다른 논리도 없습니다. 언론도 자유도 조국이 없으면 향유할 수 없으니까요.

* 비평의 대상은 당연히 반론권을 취득한다.

  어떤 비평에 대해서, 그 대상이 반론을 제기하면, 그때부터는 토론이 되겠지요. 비평 대상은 당사자가 되면서, 당연히 반론권을 취득합니다. 이것도 천부인권이요, 도덕과 헌법이 보장하는 것입니다. 비판해 놓고는 당사자 또는 그 편에 서는 제3자의 반론권을 부정한다면, 이는 마땅히 비평으로 볼 수가 없는 거지요. 이건 비난에 불과한 것입니다. 많은 엉터리들이 비난을 비평으로 포장하려 들지요. 이건 관객들의 높은 수준만이 막을 수 있습니다.

  비평과 토론에는 또, 연합군과 동맹군이 있기 마련입니다. 안 그러면 재미도 없지요.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지 않습니까? 끼리끼리 모이는 것이 뭐가 이상합니까?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이걸 백해무익의 편 가르기로만 보는 시각이, 오히려 왜곡된 것 아닐까요? 다만, 참전을 할 때에는 선전포고의 변도 있어야 하고, 편들고자 하는 일방 당사자의 논리를 도와줄 수 있는 이론적, 통계적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감정적, 감성적인 것만으로는 곤란할 것입니다.

  참전하면서, 원래의 주제를 변질시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건 큰 문제일 겁니다. 이런 것들이, 관객이 비평과 토론을 혐오하고 편 가르기로 치부해 버리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따위라면 안 하는 게 좋아.”하는 뜻이지요.

* 관객은 비평과 토론의 주인이다.

  비평과 토론에는 또, 관객과 청중이 필요합니다. 한편으로는, 관객은 비평과 토론의 주인이니까요. 관객이 없는 비평이 무슨 실익과 재미가 있겠습니까? 비평과 토론은 하나의 주도권 쟁탈전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분명히 그 실체는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을 겁니다. 그게 사람 사는 동네의 모습이요, 자연계의 이치요, 변화와 진보의 상징이니까요. 많은 학자들이 진보는 투쟁으로서만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다만, 조용하고 고급스러운, 이성적인 투쟁을 바라는 거지요.

  주인인 관객이,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로 비유될 수 있는, 토론자들을 추잡한 싸움이나 하는 사람들로 격하시켜, 뜯어 말리려 하거나, 백안시 한다면, 이건 더 큰 문제일 겁니다. 조용히 감상하거나, 어느 한 쪽에 참전하거나, 교통순경 내지는 사회자가 되거나, 배심원 내지는 판정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우리 기타매니아가 명실 공히 선진 비평문화의 한 가운데 서게 되고, 모범생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지 않을까요?

* 토론에는 교통순경이 필요하다.

  비평이 토론으로 발전하면, 질서유지를 위한 사회자가 필요합니다. 당사자 그룹의 어느 구성원이 주제를 이탈한다거나, 예의를 갖추지 못한다거나, 자료를 준비하지 않고 동문서답을 한다거나, 엉뚱한 곳에 악이용하려 한다거나 하면, 이는 가차 없이 배제, 축출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 기타매니아가 또한, 선진 모델이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 역할은 좋던, 싫던 수님이 해야 할 위치에 있지만, 사실 수님은 입장이 난처할 것입니다. 오해의 소지도 커지고요, 열 손가락 깨물면 다 아프거든요. 우리 기타매니아가 이런 수준을 넘어서 있다면 별 문제이지만, 아마 당분간 수님은 곤란할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런 경우에는, 관객 중에서 몇 분이 나서서 교통순경, 사회자를 자임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회자는 중립이어야 하고, 주제의 가치판단에 관련된 어떤 의견도, 주장도 내어서는 아니 되지요. 다만 질서유지를 할 뿐입니다. 배심원인 관객에 의한 판정은, 주제나 과정에 따라서, 유보될 수도, 실행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이 판정이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닐 것이므로, 당사자들은 여기에 집착할 필요는 없겠지요. 판정은, 판정주체의 성향과 시점과 장소 등, 여러 여건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므로, 그냥, 재미로 한판 토론을 하였다는 것으로써,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토론이 다음에 올 주제나, 인간적인 것과 결부되어서는 당연히 아니 되겠지요. 그때는 우리 모두가 팔푼이가 되고 맙니다.

  비평의 주체와 대상 및 여건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투정(?)을 부리는 간절한님의 주장은 경청할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뉴욕 칭구의 견해도, 전체를 보는 시각에서는 옳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자유의 내재적 제한과, 비평에 대한 준비 및 격식에 대해서는, 간절한님과 뉴욕칭구의 생각을 알 수 없으므로, 이 부분에 대한 제 생각은 님들과 다를지도 모릅니다.

  gm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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