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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tarMania

(*.220.243.58) 조회 수 47068 댓글 0

기타계 인물 소사 - 수정 10차 -1/3

2019218. 강우식 초고, 최동수 가필.

2020711. 수정(10). 최동수 수정.

 

 

■■■ 아래 내용은 대략 2000년까지 기타계에서 활동하던 분들 중에

이미 여러분의 기억에서 사라졌거나 머지않아 사라질 분들의 기록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활동 중인 회장단뿐만 아니라 저명한 연주가와 제작가들도

거의 제외되어 있습니다.

기억이 흐려지기 전에 그동안 듣고 보았던 얘기들을 간추렸으나,

오류나 누락된 사례도 있을 터이니, 원로들과 현역 여러분께서는 수정 내지

보완할 사항이 있으면 주저마시고 김성진 교수님과 상의하시기 바랍니다.

현역으로 활동하고 계신 분들 중 양해 받은 분들을 제외한 인물들에 관한 기록은 미완성 상태로,

귀추를 예상할 수 없기에, 향후 10여년 후로 미루고 일단 본문에서 삭제하였습니다.

빈번한 수정으로 혼란을 야기한 점을 사과드리며 너그러운 이해를 구합니다.

따라서 이전의 기타계 인물 소사는 모두 폐기하시기 바랍니다.

가칭 [기타계 인물사]는 현역들이 은퇴한 후에나 완성되리라 예상됩니다.

어언 고령으로 인해 후속 작업은 김성진 교수님께 위촉하였습니다.

(연락처 : 010-3380-3204).

 

[수정 내용 요약] : 기록 삭제

- 송무정, 오해권, 이희진, 장승호(4).

 

 

 

[차례]

1. 여명기黎明期 ( 1945 1959 )

) 최초의 기타연주회

) 기타 연주회의 태동胎動

2. 초창기初創期(19591974)

). 매스 미디어

). 이어지는 기타 연주회

). 기타 학원들

). 기타 콩쿨 대회

). 음악협회에 가입되다

). 기타 연주가

). 기타 제작가

3. 개화기開化期 (19752000)

). 산업화와 대량생산

). 외국 연주가들의 내한

). 국내 기타인

). 해외 기타인

4. 발전기發展期(2000현재까지)

). 지도자 육성

[부록] 한국기타협회 역대 회장단(2019120일 현재)

 

 

1. 여명기黎明期 (...1945 1959 )

). 최초의 기타 연주회

우리나라 최초의 기타 연주회는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습격하므로써

태평양 전쟁(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인 1940년에 서울 부민관

(현 세종로 덕수궁 옆 서울시의원 회관)에서였다.

이는 당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기타연주자 정세원과 김인걸의 연주회였다.

 

정세원鄭世源 (1926? 재 북한, 작고)

그는 재령갑부의 자제로 일본 유학시절 많은 일화를 남겼다.

첼로를 닮은 미야모도 긴빠찌宮本金八 작 비올론 모델이 나왔을 때 아무도

그 기타의 뚝심을 당해내지 못했다.

이는 일반 기타 형태가 아니고 바이올린처럼 스프루스 앞판과 메이플 뒤판이

곡형이고, 안쪽에 고이는 지주(魂柱)가 있었다.

기타수리로 세고비아의 찬사까지 받은 제작가 미야모도는 그러나 허탈해 있었다.

이때 유학생 정세원이 나타나 그 기타로 타레가의 호타, 아리랑 변주곡, 등을

연주하자 방중이 모두 놀랐다.

미야모도는 뛸 듯이 기뻐하며 그 기타를 증정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정세원은 굳이 사양하고 거금을 치루었다.

더욱 감격한 미야모도는 후에 [평화平和]호라 이름 지은 또 한 대의 명품을 그에게 기증하였다

- 평화호는 침략으로 고생하는 유학생을 위로하는 뜻이 담겨있는 듯하다.

이 악기에는 정세원을 위해 이 기타를 제작하였다고 쓰여 있다.

평화호는 정세원이 소장하고 다른 한 대는 김인걸을 거처서 이성룡에게 넘겨졌다.

그는 부민관에서 2회나 연주회를 하면서 자신의 자작곡인 아리랑 환상곡도 연주하였다고 한다.

또한 비제의 가곡 진주잡이도 트레몰로 곡으로 편곡하였다는데

아쉽게도 남아있지 않다.

일본의 [Asian Evening]의 라디오 프로에도 자주 출연했었다.

그는 상해에 체류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고향인 북한으로 돌아가서

명망 있는 연주가로 활동 했다고 한다.

연세대의 고 황병기 교수와 경희대 고 김동진 교수가 모두 동기생들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진남포 연주 후 1963년경 병석에 누워 사후에

소장했던 기타를 함께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는데 그 후 자세한 소식은 전해지지 않는다.

조석근, 임창년, 박종문, 황병갑 등이 그의 제자였다.

 

이종석李鍾碩 (1917 - 2014)

5년 전까지도 기타협회의 고문을 역임한 기타계 최고령(97)이셨다.

도쿄의 미조부찌 고고로溝淵浩五郞에게 수학하였다

(미조부찌 기타 교본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채택 사용되었으며,

타레가 연주법과 편곡은 매우 아름답다).

그가 소장했던 100엔의 기타는 엄청난 큰 액수였다.

당시 일본인들도 100엔짜리 지폐는 만져보기 힘든 거액이었다.

퇴계로에 살다 6.25 전쟁 피난에서 돌아와 보니 그의 기타는 분실되고 없었다.

후에 광주로 옮겨 미공사美工社를 경영하다 불의의 사고로 손가락을 다처서 연주는 못하게 되었다.

이응주와 합작하여 기타협회의 엠블렘을 공동 디자인하였다.

유명한 연주가 안춘열을 배출하여 쏘르의 앙카르주망 2중주를 최초로 공연했다.

후에는 전남대학 기타반을 지도하여 여려 차례 전국 합주와 콩쿨 우승을 시킨 지도자이다.

김태수, 양영근, 변보경 등의 우수한 제자들을 낳게 했다.

 

김인걸金仁杰(1921?-1978?)

우리나라 최초로 기타를 배웠고 초대 한국기타협회장을 맡았으며

한국 배우 전문학원장으로 우리나라 연극영화 배우를 양성 배출시킨 분이다.

그는 평양이 고향이고 일본 도쿄에 유학하여 오구라 슌小倉俊을 사사했다.

사진은 외국인들이 끼여 있어 내놓지 못하고 있다가 1973년경에 공개했다

- 당시는 냉전시대여서 이북에 있는 사람의 사진 공개를 꺼려했었다.

그는 비제의 진주 잡이 같은 서정적인 곡을 좋아했고 그날은 기타 2중주도

선보였다고 한다.

해방 후 귀국하여 명동에 기타학원을 열고 후진 양성에 힘썼으나 해방 후의 혼란기,

6.25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상태라 경영이 어려워 한국 배우 전문학원을 충무로 영화가映畵街에 차렸다.

유현목 감독을 강사로 좋아했고 신성일 엄앵란 등의 스타들을 배출하였다.

그는 기타인과의 교류를 즐겼고 항상 친절한 격려를 아끼지 아니했다.

김인걸은 당시 기타인의 사랑방 역할을 하던 엄상옥 공방도 자주 찾아가

후배들의 연주를 듣고 즐겼다.

그는 평생 손톱을 길러 자신이 기타리스트임을 잊지 않았다.

연주회 때는 무대 뒤에까지 와서 조언을 했고 때로는 관객석의 의자 정리까지도

서슴없이 하면서 후배들을 격려하는 겸손함이 몸에 밴 분이다.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제2악장을 암보하여 연주할 수 있다면서 즐거워하였다.

기타는 작은 오케스트라이다라고 말한 베토벤의 말을 자주 인용했으며,

언론잡지사 기자들과 늘 가까이 했으며 예술인, 문인들과도 친했다.

호방한 성격의 정세원과는 달리 김인걸은 매우 예의바르고 섬세한 성격이었다.

그의 소장 악기인 스페인제 발렌시아를 친구가 2개월 기한으로 빌려간 후에,

3자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도 차마 반환을 요구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주말 등산을 즐겼는데 환갑을 지나서는 길에 자란 풀도 함부로 밟지 않고

벌레도 생명이 있으므로 잡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1970년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가 양성한 배우들도 눈치 채지 못하게

위암으로 생을 마쳤으며 캐나다로 이민간 자식에게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 기타 연주회의 태동胎動

19591129일 프란시스코 타레가 탄신 107주년을 기념하여 경복궁 우측

당시 수도육군병원 강당에서 최초로 합동 기타연주회가 열렸다,

이는 건국 후 최초의 기타연주회였다.

추운 날씨였으나 처음으로 기타 연주회에 참석한 청중들의 환호는 대단하였다.

원형계단식으로 된 관객석은 높은 곳에서 듣게 되었으므로 소리가 잘 울렸다.

청중들 중에는 언론기자, 제작가, 악기점 관계자들도 많이 참석하여 관심을 보였다.

출연자는 김인걸, 황병갑, 하희영, 박종문, 한세남, 강우식 등이었으며 독주곡 이중주곡

외에 4중주로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춤 등이 연주되었다.

이렇게 훌륭한 음악회를 대형극장에서 하지 않았느냐고 의아해 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 후 을지로 입구 원각사에서 공연계획이 있었으나 화재로 인해 무산되었다).

1960년 여름 하희영, 한세남, 강우식과 박종문으로 구성된 4중주단은

용산에 있는 미군방송 AFKN-TV에 출연하였다.

방송효과는 즉시 나타나서 미군 장교클럽에서도 초청이 왔다.

같은 해 1216일에는 KBS 1스튜디오에서 방청객이 참석한 가운데

기타 4중주를 하였다.

이런 합주공연이야말로 기타음악이 활성화 되는데 일조 했다고 여겨진다.

한편 강우식은 춘천 육군병원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춘천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그는 춘천 도립문화원에서 매년 호반앙상블 연주회를 개최한바,

강우식, 장수익, 한광석, 이낙경, 박철근 등이 주요 멤버였다.

 

 

이성용李晟用 (1928 - 작고)

그는 일본이 태평양 전쟁(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전인 1940

정세원의 부민관 연주회 후에 문하생을 모집하므로 서대문 인근

정세원 댁 근처에 있는 중국음식점 2층에서 정세원과 조교 김인걸을 사사하였다.

그는 ‘1937년작 미야모도 긴빠찌宮本金八기타를 최후까지 소장하였다.

그는 많은 기타 악보를 소장하여 기타인들에게 제공했으며,

성균관대학 기타반을 지도하는 한편 이응주, 하희영과 합주운동을 일으켰다.

본업은 광산업鑛産業이었으나 미국 국제원조처, 애견협회이사, 야인野人 임창년의 후견인,

음악인과의 교류, 법원 출입 등 다방면에 달인이었다.

박석환, 이희진, 한광석 및 성균관 대학의 성음회원 등이 그의 제자이다.

 

임창년林昌年 (1926? - 작고)

기교가 뛰어나고 섬세한 음색과 음악의 아름다운 표현력은 듣는 이를 매혹시켰다.

 ‘한국의 세고비아라는 칭송을 받기도 한 그의 연주는 완벽해서 미스 터치를 볼 수 없었다.

우교순, 홍종극 등 우수한 제자들을 배출했고 엄태흥 조무광 등이 그를 추종했다.

그는 아포얀도 주법으로 탄현하되, 손가락 끝이 다시 U 자로 되돌아오면서

알 아이레 음색을 동시에 나도록 찍어 누르는 연주법은 그만의 수행으로 익혀서

누구도 따를 수 없었다.

김인걸 회장도 그의 연주를 높이 평가했고 보리피리작곡가 조념 교수는 기타곡을 헌정했었다.

그의 연주기법은 비올론 기타의 소리를 효과적으로 내도록 하는 훈련에서 나온

결과로 추측되며 악보의 철저한 분석 등 그의 탐구정신은 모든 사람을 감동시켰다.

 

이응주李応宙 (1926? - 작고)

3,4,5대와 제11,12,13대 기타협회장을 장기간 역임한 분이다.

해방 후 인천에서 기타학원을 운영하다 서울에서는 독립문 근처와 신촌에서 후배를 양성하였다.

이성용, 하희영과 중주 활동 및 후에 서울대 화현회, 이화여의대 기타반을 지도했다.

그는 타고난 예술가요 한량이었다.

그의 토레스를 찾아서라는 전국 방랑기는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서예書藝에 조예가 깊고 문필文筆도 뛰어나서 금수현(지휘자 금난새의 부친)

운영하던 월간음악지의 편집을 돕기도 했었다.

 

박승천朴勝泉 (1927? 작고)

일본에 유학하여 오구라 슌小倉俊에게 수학하였고 일본의 기타인들과 교류하였다.

그는 불광동에 기타학원과 악기점을 차리고 제자양성에 힘썼다,

한때는 서울 역전에 맥주홀을 열어 기타 연주 스테이지도 시도했다.

그의 딸 박혜순 양은 파리에 유학하여 사다노프스키 밑에서 수학하고

일본 오사카와 서울에서의 연주회도 가졌었다.

그녀는 프랑스 파리 대학에서 기타교수를 하고 있다.

 

하희영河喜榮 (1927? - 작고)

김인걸을 스승으로 모셨고 서울 시청 공보계장으로 재직하면서 공무와 기타협회

행정을 도맡아 했었다.

스페인 세레나데와 알함브라의 회상이 일품이었고 73년 합동연주회 때는

현악사중주와 비발디협주곡을 최초로 연주했다.

평소 온화한 성격으로 대인관계가 좋아 엄태흥 등 많은 제자들을 길렀고

이응주, 이성용 등과 합주 팀을 구성하고 임창년, 제작의 엄상옥, 이완근 등과도 교류하였다.

 

배영식裵永植 (1927 - 작고)

부산을 거점으로 많은 음악활동의 공로로 부산시 문화상을 탔다.

일본의 국제기타행사에 참여하였고 베렌트와도 처음 사귀었다.

그가 1962년 국립극장에서 연주할 때 사용한 음향반사판(Horizondo)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사용한 유일한 시도였다.

많은 기타교본과, 걸출한 제자(김금헌, 조재경) 등을 배출하였고 아들 배학수도

뛰어난 연주가이고 제작가이다.

이표李杓 (1927 -작고?)

파란만장한 청년시절의 고난 탓인지 방랑객放浪客의 모습이 떠오른다.

중학교 1학년 무렵 일본 도쿄에 유학하여 사사끼, 고가 마사오 선생께 4년간 수학하였다.

8.15 광복 후 귀국해서는 함경도 고향에 돌아가 반공유격대원으로 투쟁하다 붙잡혀서

우즈베키스탄의 수용소에 5년이나 갇혀 있었다.

수용소에서 얇은 합판 쪼가리를 주워서 기타를 만들어 퉁기면 수용소의

로스케 관리들도 가까이 다가와 귀를 기울이곤 했다.

덕분에 특별대우를 받게 되자 어느 날 용케 탈출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6.25 전쟁이 터지자 1.4후퇴 때 월남하여 서울에 자리 잡았다.

그는 후에 독립운동 경력을 인정받아 성남시 독립 유공자 아파트로 이주하였다.

그는 홍익대와 신촌을 거점으로 제자 양성과 기타제작도 하였다.

당시에는 가요 기타도 가르첬으므로 다녀간 제자가 2천명이 넘는다고 했다.

그중 클래식을 배운 제자만도 2백명가량 된다고 하니 실로 엄청난 숫자이다

 

박종문朴鍾文 (1927 - ?)

외항선 선원 출신으로 정세원을 따라 다니면서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등을 즐겼고 이득춘 등

제자를 두고 앙상블에도 자주 참여했다.

 

황병갑黃炳甲 (1928?, 미국 뉴욕 이민, 작고)

그는 기타뿐 아니라 콘트라베이스의 선구자였다.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여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보낸 분이다.

벤조 마림바 등 만능 연주자였다.

충무로의 무학성 카바레에 정기 출연했는데 그가 합류하면 앙상블이 저절로 흥이 난다는 정평이 있었다.

KBS 교향악단과 최초로 김희갑 편곡의 타레가의 카프리치오 아라베 협주를 하였으며

시노폴리의 스페인 세레나데도 연주했다.

당시 인기 있는 라디오 프로인 수요일 밤의 향연에 계속 출연했고 용산에 있는

미군의 AFKN TV 방송프로의 핵심 연주 멤버였다.

미국 뉴욕에 이주하여 카프테리아에서 연주생활을 하였다고 들린다.

 

한세남韓世男 (1929 - 작고)

필자의 기억에 연습량이 가장 많았던 분이다.

함흥에서 교사를 하다 형제가 월남했는데 러시아어에 능통했고 기타음악에 관한

이론서적을 많이 수집하여 연구를 쌓았다.

박자 관념이 철저하고 합주, 합창지도에 능했다.

매사에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였고 동양 FM 방송, 국립공보관 문화센터

기독교 방송국 후원으로 기타반을 개설하여 수백명의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1961년에는 소공동 중앙공보관에서 강우식과 함께 2주 간격으로

7회에 걸친 기타음악의 밤을 개최하였다.

월남越南 참전 시절에는 UN 연합사 음악회에 한국군 대표로 기타를 연주한 적도 있다.

예편 후에는 묵호 고등학교에서 기타 전문반을 양성하다가 과로로 뇌출혈을 일으켰다.

병석에서도 해외교류 등 열의가 대단했다.

 

안춘열安春烈(1930-1972?)

이종석의 제자로서 가장 뛰어난 연주자로 6.25 전쟁 시 8백리 피난길을 기타를

자전거에 매다는 등 생명을 걸고 기타를 놓지 않았다.

홍난파의 조카 홍지유와도 교류하며 많은 연주활동과 방송활동을 하였다.

그는 단파방송을 청취하며 외국의 연주 방송을 참고하여 밤을 새워가며 연구하였다고 한다.

유달리 기타에 정렬을 쏟으며 활동하던 그의 요절夭折은 아쉽기만 하다.

그가 기독교 방송에서 연주한 작품은 만돌린 합주를 포함해서 2시간이 넘는 자료가 남아있다.

 

강우식姜佑植(1932 - 현 기타협회 고문)

6,7,8대 기타협회장을 역임했던 그는 신경내과 박사로 군의관 재직 시

수도육군병원에 음악실을 개설하여 합주단 활동을 지원하였다.

국내에서 안춘렬에게 입문하였고, 미국에서는 소포클래스 파파스를 사사하였다.

60년 중반에 일본 음악가 고부네 고지러小船幸次郞의 기타화성학을 김명표와 공동번역 하였다.

지그프리트 베렌트의 내한 공연 시 열과 성을 다해 영접하는 등 국제교류에도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는 경희대 음대의 한성석 교수가 작곡한 야상곡을 초연한 적도 있다.

그는 세계적인 신품 명기의 수집가로 한때 30여대의 소장악기를 본 기억이 있다.

대표적인 소장악기 중에는 이그나시오 플레타 1세가 있다.

그는 오디오 수집가로 일본의 오디오 연감에도 소장품이 소개된 적이 있다.

한편 그는 ,,에 뛰어난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17131791)9대손으로

백여 점에 달하는 표암의 유작 중 거의 절반을 소장하고 있다.

 

김용호金龍湖 (1933 - ?)

일본에 유학하여 작곡을 전공하고 제9,10대 기타협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기타곡 뿐만 아니라 특히 불교예불찬가 등 많은 작품을 남겼었다.

 

그 외에 일본 유학생으로 해방 후에 소식이 끊겼으나 나리다 도시오라는 일본명으로

방송계에서 활약한 성리진成利鎭, 이채진, 박옥규와 프랑스 유학시절에 기타를 익힌 박성종 신부 등이 있다.


---------여기까지 1/3부 ------------->  2/3부에 계속  됨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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