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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tarMania

김기인2009.05.21 01:31
한글은 세종대왕이 주관하여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여 창제한 것이긴 하나..

근원은 북인도 굽타왕조가 세력을 확장 함으로 인해 굽타언어와 문자가 티벳어로 다시 중앙아시아를 거쳐 몽골의 파스파 문자로...같은 어족인 우리말도 당연히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TV 프로그램에서 보았는데 북인도 굽타지역의 간판이 한글과 아주 유사하고 아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도 정말 비슷한 단어가 많이 있고..

세종대왕 당시 언어학자들이 이를 좀더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한글의 체계를 완성 하였다고 보아 집니다..
당시 동서양을 막론하고 문예부흥기 즉 르네상스 시대를 맞아 실용을 중요시 하고 과학과 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하던 시대적 요구이기도 하였지만..

시를쓰고 문학을 하던 양반들이 모든 행정을 맡아보던 시대이다 보니 기득권 보호차원에서 한글이 사장되다 싶이 하였지요..

우리가 중학교 다닐때 한글학회 이사장을 지내셨던 고 최현배 선생님 "말본"으로 한글문법 공부를 하였던 기억이 있죠..

최현배 선생님의 제자분들이 재직하고 있는 대학의 국어교육과 교수들은 한글 전용론을 주장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국어교육과 인데 졸업논문에 한문 들어가면 난리 납니다..

그러나 한글전용으로 뜻이 애매모호 할때도 있는데..

이미 사장 되었지만 이두문자도 있었고..역사는 힘있는 자들의 것으로 기록되고 또 정당화 되어 기록되는 것은 사실 입니다..

그러나 콩쥐님이 올리신 글의 연구도 관심을 가지고 계속 연구해 볼만한 내용이라 생각이 듭니다..

아래글은 네이버 블로그에서 퍼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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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들은 한문으로 쓰인 경전을 思惟의 근원이자 생활의 지침으로 삼고, 이를 익히는 것이 개인과 나라의 문화 역량을 키워 나가는 길이라고 여겼다. 이 과정에서 한문은 중국어의 문장이 아닌 사유의 문장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 조상들은 중국어를 말하지 않고 문장어로서 한문만을 받아 들여 사고의 지평을 넓혀 나간 것이다. 그러나 우리말을 바탕으로 한 근원적인 사유의 방식은 한문으로 된 경전을 읽고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조상들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하나는 중국어식으로 경전을 읽는 것이고, 또하나는 우리말의 흐름에 맞추어 경전을 고쳐 읽는 것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우리말의 흐름에 맞추어 한문 경전을 읽는 쪽을 선택 했으며, 심오한 진리가 담긴 경전 속의 한문을 읽으면서 모국어로 사유하는 지혜를 발휘하였다.



구결(口訣)이라는 말의 어원을 '口傳秘訣'에서 찾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구결의 전통과 관게가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한문 문장에 구결과 가타가나를 보조문자로 사용한 전통을 공유하였고, 이 때문에 오늘날에도 한국어나 일본어의 표기 양식에서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한 문장을 기술하는 데 여러가지 문자를 섞어 사용하는 것은 우리 나라와 일본이 공유하는 표기양식이다. 우리만 해도 한글과 한자와 알파벳을 함께 사용해도 별로 이상하게 느끼지 않고, 실제 많은 기록들이 한글과 한자의 혼용 형태로 쓰여지고 있지 않은가.



우리 민족이 처음 대면한 문자는 한자였다. 이 문자는 비록 남의 것이지만, 우리의 생각을 시각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시각화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한자는 우리에게 살아 움직이는 팔다리가 아닌 보조도구로서의 휠체어에 지나지 않는다. 지배계층은 한자를 접한 때부터 15세기까지 여전히 한문을 자신들의 진짜 팔다리로 인식하고 있었다. 한문의 명칭을 '진짜글(眞書)' 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의 신분을 드러내는 데 걸맞았다. 그들은 남부럽지 않은 수준 높은 문자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가짜글에 지나지 않는 새로운 문자는 전혀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지성으로 사대하여 오직 중국의 제도문물을 중심으로 같은 글자를 써왔습니다. 이러한 때에 지금 따로 언문을 만들어 중국을 버리고 오랑캐와 같이 되는 것은 문명에 큰 폐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라 설총의 이두는 우리를 위한 것이지만 다 중국에서 쓰는 글자를 빌려 말의 표현을 도왔으므로, 원래부터 서로 동 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우리나라가 원래 한자를 모르던 먼 옛날과 같다면 우선 언문을 빌려서라도 임시로 쓸 수 있겠지만, 그래도 바른말 할 사람은 시간을 두고 한자를 익혀 장구한 계획을 세우느니만 못하다고 할 것 입니다.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함은 예부터 내려오는 폐단입니다. 지금 이 언문은 신기한 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옛사람이 만들어 놓은 운서에 되지 않은 언문을 붙이고 이것을 강력하게 세상에 널리 시행하려 하시니 후세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백성을 다스리는 데 하나도 이롭지 않은데 왜 굳이 힘을 들이고 연구하십니까?"

-- 세종실록 103권

이는 최만리,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등의 집현전 일부 학자들이 언문창제의 부적절함에 대해서 세종에게 상소한 내용이다. 언문을 쓰면 오랑캐가 되고, 언문은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고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포괄적 입장에서 본다면 훈민정음은 새로운 문자였으나, 좁은 입장으로 보면 한자음 표기를 위한 발음기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세종이 새로운 문자를 만들고 그 이름을 왜 훈민정음이라고 붙였는지, 즉 '바른소리'라고 불렀는지도 어렴풋이 이해할 수도 있을 듯하다. ....세종조에 신숙주, 성삼문 등이 요동에 가서 호아찬에게 語音과 字訓을 질정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질정을 통해 당시의 중요한 운서들인 <洪武正韻>과 <四聲通考>등의 책을 지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홍무정운은 아마도 홍무정운역훈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홍무정운은 1375년 명나라에서 중국의 남과 북에서 쓰이는 한자음을 통일하려는 목적으로 만든 한자음 사전이고 홍무정운역훈은 중국발음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집현전 학자들은 황찬에게서 한자음과 운서의 체계에 대해서 배우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며, 중국의 한자음과 조선의 한자음의 차이를 어떻게 인정하고 어떻게 표기 하면 좋을지를 고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들은 훈민정음의 음운체계에도 자연히 반영 되었을 것이다. 훈민정음이 한자음을 표기할 목적도 가지고 있었음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 셈이다.



훈민정음 창제의 부당함을 논하는 자리에서 인근주변의 국가들이 자기들의 문자를 쓰고 있는 예를 들면서, 이들은 모두 오랑캐이므로 자기 문자를 갖는 것은 곧 스스로 오랑캐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다. 이 때 최만리가 상소에서 언급한 몽골, 서하, 여진, 일본, 서번등의 문자는 아마도 조선 시대에 잘 알려진 문자였을 것이다.



산스크리트어는 고대 인도의 언어로 중국과 한국에서는 이를 梵語라고 부른다. 따라서 범자란 범어를 표기한 글자를 말한다. 산스크리트는 오늘날까지 종교, 철학, 문학 용어로써 지식계급 사이에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해 왔으며, 불교 경전이 바로 이 산스크리트어로 적혀 있다. 따라서 인도에서 시작 된 불교와 불경이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 오면서 범어와 범자도 자연스럽게 유입 된 셈이다. 이렇게 보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 당시 이를 참조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보인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인도의 고대 문자가 셈계 문자의 고형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연구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고대 페니키아에서 메소포타미아를 거쳐 기원전 8세기경에 상인들에 의해 문자가 인도로 전해진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이러한 고대 인도 문자는 다시 굽타 문자를 낳고 굽타문자는 다시 티벳문자를 낳고 이는 다시 몽골의 파스파 문자로 이어지므로, 훈민정음이 파스파 문자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도 그냥 억측으로 돌릴 수는 없지 않은가 한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유희는 <언문지>에서 각각 한글의 몽골자 기원설을 주장한바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이해 한다는 것은 자기가 속한 사회가 마련한 안경을 쓰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경의 렌즈는 우리 사회의 문화와 관습, 묵시적 사회 윤리가 통합되어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사는 때때로 우리에게 알려진 것보다는 숨겨진 것에서 진실을 찾아야 할 때가 있다. 더구나 하나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가 지나치게 주관적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든다면 자신이 쓰고 있는 안경을 한 번쯤 바꿔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안경을 쓰고 있는가?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은 행정 관리이면서 또한 그 시대의 학문을 이끈 학자들이라는 점에서 오늘날의 관리들과는 개념이 달라 보인다. 그들의 정치행정적 임무라는 것이 이처럼 중국의 문헌을 찾아 옛 것을 고증하고 이에 따른 제도를 마련하여 실시하는 것이었다면, 관리들은 그 과정에서 중국 문헌을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자연스럽게 학문적 역량을 키웠을 것이다. 당시 관리가 되려면 양반 자제들 중에서 일정한 과거 시험을 거쳐야 했는데 그 시험 과목이 모두 유학의 경전인 사서 오경이거나 詩,賦의 한문 문장이었다. 그러니 조선의 양반 사회가 중국의 학문과 한문 문장에 얼마나 기대고 있었는가는 짐작 할 만하다. 훈민정음 창제 반대 상소는 당시 모든 사대부 계층의 당연한 반응, 예상되는 격돌이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백성들에게 유교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 이상의 교육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더구나 백성들이 문자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인식은 조금도 없었다. 문자 생활이란 오직 사대부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시민 의식이나 평등 의식이 성숙하지 않은 사회에서 기득권이 문화 생활을 독점하는 현상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도 발견 할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런 사대부 학자인 최만리가 보기에 백성들을 위해, 더구나 할 필요도 없는 일을 위해 임금이 저리 마음을 쓰고 또 대를 이을 세자까지 그 일에 종사하도록 하는 것은 마땅치 않은 일이었다. 국가의 이익을 먼저 생각한다면 중국과의 사대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이 우선 과제였다. 즉위 초기에 그토록 명민하고 지혜롭던 임금이 이 일로 성총을 흐리고 있으니 신하로서는 목숨을 걸고 바로 잡아야 할 일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1894년 11월에 고종은 우리 문자사에 기록 될 획기적인 칙령을 공포한다. 칙령 제1호인 公文式은 다음과 같다. "법률 칙령은 다 국문을 본으로 삼고 한문 번역을 붙이며, 또는 국한문을 혼용함." 드디어 우리 문자의 우월한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자가 우리 문자 생활에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또한 이 칙령에서 우리 문자에 대한 명칭을 기존의 언문으로 하대하던 것을 '나랏글'이라는 뜻의 '국문'으로 격상시킨 것이 주목 된다.



우리는 <독립신문>이 한글판과 영문판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재필이 발간한 독립신문이 영문판으로도 나온 것은 한자 중심에서 영어 중심으로 축이 넘어가는 시대 풍경을 반영한 데 지나지 않는다. 사실 세계의 패권이 중국에서 서구로 넘어간 국제적 변화가 이러한 상황을 제공한 것이다. 이 시대의 세계를 로마 제국이 지배헸다면, 서재필은 어떻게 했을까? 언어 기호를 통해 현실 세계를 재현할 수 있듯이, 현실세계의 권력이 언어 사용을 강요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이 왜 그동안 한자를 숭상했겠는가? 이제 중국은 그 권력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는 더 강한 권력을 가진 언어에 중속 될 것을 예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문자가 처음 만들어 졌을 때 명칭은 訓民正音이었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의미이다. 줄여서 정음이라고 한다. 한자를 진짜 글인 '眞書"로 부르던 이 시대에 정음은 상말 글인 '언문' '언서''언어'등으로 격하 된다. 한편 사대부가 아닌 여자나 아이가 사용하여 '암클'이나 '아햇글', 유교에 의해서 밀려 난 불교의 중들이 사용하는 글이라는 의미로 '중글' 또는 '절글'등으로도 불린다......훈민정음은 심지어는 한자를 읽기위한 보조 수단이라는 의미로 한자어 발음 표기법의 명칭인 '反切'로도 불린다. 이러한 많은 명칭중에서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15세기부터 갑오경장까지 '언문'이라는 명칭이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된다. 갑오경장후에 고종 황제가 종묘에서 자주 독립을 선포 한 뒤, 법적으로 나랏글이라는 의미로 '국가문자'로 명칭을 정하게 된다. 줄여서 '국문'이라고 한다. 한글이라는 명칭은 주시경에게서 비롯 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1913년 간행 된 <아이들 보이>라는 잡지의 끝에 제목으로 '한글'이라 한 것이 있다. 이 명칭은 조선어학회가 훈민정음 반포 8회갑이 되는 해 (60*8=480)인 1926년 음력 9월 29일을 반포기념일로 정하여 '가갸날'로 부른 뒤, 1928년에는 가갸날을 한글날로 고쳐 부르게 되면서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다. 한글은 "韓나라의 글', '큰글', '세상에서 첫째가는 글'등으로 해석 될 수 있다.



한글맞춤법 통일안 하면 1933년 조선어학회에서 나온 것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과연 맞춤법 통일안이라는 것이 없었을까? 그리고 정부의 공식기관도 아닌 하나의 학회에서 만든 맞춤법안이 어떻게 그렇게 절대적인 공식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한글맞춤법 통일안은 그 이전에도 있었다. 1910년 한일합방이 일어난 이후인 1912년 4월 조선총독부에서는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이라는 책을 발간한 적이 있다. 일제는 합방후에 보통학교에 쓰이는 <조선어독본>의 언문철자법을 평이하게 할 목적으로 여덟명의 조사촉탁원에게 지시하여 철자법을 결정하게 한 것이다. 조사원 가운데 일본인이 네명, 한국인이 네명이었는데 현은, 유길준, 강화석, 어윤적이 그들이다. 이들은 1911년 7월부터 11월까지 다섯차례의 회의를 거듭한 끝에 1912년 4월에 언문철자법을 확정하였는데 비록 총독부에서 주도한 것이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철자법이라고 할 수 있다.



총독부가 세차례에 걸쳐 작성한 철자법 통일안의 특징은 처음에는 표음주의를 택했다가 중간에는 표음주의를 원칙으로 하되, 표의주의를 어느정도 인정하게 되고, 나중에는 표음주의를 버리고 표의주의를 택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3년 뒤 만들어지는 한글맞춤법통일안과 매우 유사한 형태를 띄게 된다. 맞춤법의 기본원리가 표음주의에서 표의주의로 돌아서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주시경학파의 활발한 한글운동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더군다나 총독부의 언문철자법 심의 과정에 주시경의 제자들인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대거 위원으로 발탁 된 점도 맞춤법의 내용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로써 조선어학회 주도의 한글맞춤법통일안이 당시 다른 통일안 규정을 주장하였던 박승빈학파의 안을 누르고 채택되게 된 것이다. 이후 조선어학회에서는 심의에 참석한 일곱명이 주축이 되어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만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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