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방이 음반으로 가득 찬 감상 공간은 굳이 음악애호가가 아니라 해도 누구나 한번쯤 꿈꾸었을 대상이다. 음악적 상징물이 주는 정신적 풍요란 옆에서 보아도 상당히 근사한 데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음반 랙에서 아무거나 집어 들어도 명반이 손에 잡히는 그런 음반수집은 소위 ‘선수’의 표식과도 같은 자부심이다. 특정 곡을 처음 듣고자 할 경우이든, 똑같은 곡의 음반이 수십 장에 달하는 컬렉션을 이룩한 경우이든 명연주, 명음반에 대한 열망은 식지 않는다.
메이저와 마이너
|
누가, 언제부터 구분을 시작한 것인지 모르지만, 음반회사(정확히는 recorded music company)를 주류와 비주류로 분류해서 불러오고 있다. 마치 스포츠 리그처럼 음반에도 메이저, 마이너 레이블이 있다는 얘기이다. 참고로 ‘레이블(label, 라벨이 표준 발음이나 음반에선 통상 레이블이라고 함)’이란 특정 상호와 상표로 대표되는 개별적인 음반회사를 일컫는다. 사실 수많은 레이블들을 메이저와 마이너로 양분시킬 수 있는 기준은 딱히 없다. 단지, 특정 음반회사와 맞먹는 규모의 단일 레이블들, 그리고 이들이 하나로 합병되며 생겨난 다국적 기업형 음반사들을 두고 ‘메이저’라는 칭호가 붙게 되었을 뿐이다.
메이저든 마이너든 각 레이블은 자신들이 표방하는 다양한 지표에 따라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연주자와 작곡가로 대별되는 레퍼토리적인 특성, 가격의 고하, 그리고 녹음의 품질 등에 따른 차이가 존재한다. 바로크 음악이나 고음악, 영국 작곡가만을 취급하는 전문 레이블들, 일반 레이블의 70~80% 정도 가격으로 훌륭한 품질을 제공하는 레이블, 혹은 고사양 포맷을 주특기로 하는 고가의 레이블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 |
|
음반이 가득한 공간은 음악애호가들의 꿈 | |
메이저 레이블
메이저 레이블들은 음반업계의 공룡, 거대 음반사들에 소속되어 있다. 이들은 거대한 인프라를 기반으로 신예의 발굴이나 중견 아티스트들의 영입, 마케팅, 유통에 이르는 뛰어난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 100년이 넘는 히스토리가 더해져서 판매자가 주도권을 갖는 시장을 쉽게 형성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각 나라별 말단에까지 이어져 있는, 전세계를 통합하는 글로벌 시스템은 메이저 음반그룹이 갖는 가장 큰 장점 중의 하나이다.
클래식 레이블의 경우를 보면 크게 영국계와 유럽(대륙)계의 양대 주류 그리고 여기에 미국계를 더한 3강 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보면 대략 파악이 될 것이다. 연륜과 레퍼토리, 아티스트의 보유 수준을 놓고 볼 때 그런 구분이 가능하다. 영국계를 보면 EMI와 Decca, London 등이 전통의 강호들이다. 1950~1960년대 명반의 산실이었던 Angel은 EMI의 하위 레이블이며, 아마 영국 레이블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음질이 아니었을까 생각되는 FFRR시리즈는 Decca의 특정 시리즈에서 출발해 아예 독립 레이블이 되었다. 유럽계의 대표주자는 독일의 DG(Deutsche Grammophon)과 네덜란드의 Philips가 될 것이다. 사실 이 두 레이블만으로도 우리가 알고 있는 클래식음악의 대부분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방대한 레퍼토리를 보유하고 있다. 고음악으로 유명한 Archiv는 DG산하 전문레이블이다. 미국계를 대표하는 레이블은 CBS와 RCA로 요약할 수 있겠다. | |
|
|
|
영국계를 대표하는 레이블 EMI |
유럽(대륙)계를 대표하는 레이블 DG |
미국계를 대표하는 레이블 CBS |
마이너 레이블
이러한 메이저 음반사가 주도해온 화려한 조직력의 틈새에서는 캐릭터가 강한 소장파 레이블들 또한 지속적인 흐름을 이어왔다. 대중음악계에서 말하는 일종의 인디(독립) 레이블인 셈이다. 이들 ‘마이너’ 레이블들은 소속 아티스트들의 규모 또는 연륜에 있어서 앞서의 ‘메이저’와 차별화되며 대중적인 인지도면에서 열세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들은 소속 아티스트와 연주, 음반의 품질 면에서 있어서는 메이저에 결코 뒤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또한 레퍼토리에 있어서도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라서 장르구분이 애매한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 자체 의사결정이 빠르고 유연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국내 드라마나 영화에서 히트곡이 나온다거나, 주요 녹음상을 받는 경우를 보면 마이너 레이블의 경우가 더 우세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들은 종종 메이저에 편입되기도 하고, 스스로 메이저급 규모로 성장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마이너 레이블에는 아르모니아 문디(Harmonia mundi), 텔락(Telarc), 체스키(Chesky), 샨도스(Chandos), 레퍼런스 레코딩스(Reference recordings), 오르페오(orfeo)등이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군소 전문레이블들이 존재하며 국가별로 조금씩 다른 이름과 상하위 병합관계를 갖는 복잡한 구조를 하고 있다. 규모와 구성에 있어서 레이블들은 정체되어 있지 않고 수시로 변화하고 있는데, 성향이 유사한 레이블들을 흡수통합하기도 하고, 이와 반대로 덩치가 커진 레이블을 세분해서 하위 레이블로 분리시키기도 한다. 또한 클래식에서는 일반적이지 않지만, 발매국가의 특성에 따라 다른 레이블로 변경해서 발매되는 경우도 있다. 특정 국가에서의 유통채널이 큰 레이블과 계약하여 발매하기 때문이다.
마이너 레이블에서 고음질 녹음이 많은 이유
| |
흔히 말하는 ‘고음질 녹음’, ‘좋은 음질’의 실체는 무엇일까? 앞서 ‘현장음의 이해’ 편에서 얘기했던 연주현장을 고스란히 담아놓은, 현장 충실도가 높은 녹음을 말한다. 종종, 특정대역을 인위적으로 부각시켜 청감상 선명하게 들리게 하는 경우를 두고 ‘고음질’로 정의를 내리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맞다 틀리다 백마디 말보다는 실제공연을 한번 다녀오는 것이 실체 파악에 가장 효과적이다. 음색과 하모닉스, 잔향시간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녹음은 앞서의 인위적인 방식과 애초부터 다른 것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런 녹음을 위해서는 연주자, 현장에서의 녹음 관계자, 앨범 총괄 프로듀서로 이어지는 제작 스탭들의 견해가 일치된 채로, 일련의 감각과 기술을 동원한 작업이 일관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명반이란 여기에 연주자의 역량이 더해졌을 때 가능한 것이다
한편, 고음질 녹음이 마이너 레이블에서 두드러지는 경우가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 간략히 말하자면, 마이너 레이블 시스템이 태생적으로 갖는 특성이거나, 아니면 마이너 레이블의 의도적인 생존전략이다. 다시 말해서, 기본적으로 소속 아티스트가 많지 않기 때문에 앨범 작업 시 메이저에 비해 많은 시간과 품질을 집중시켜 투입시키는 경우, 혹은 레이블의 설립자가 녹음과 음향 전문가라서 레이블의 컨셉을 고음질로 규정하거나 하는 경우가 된다. | |
|
카잘스의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조곡), 이 음반과 경쟁하기 위한 방법은 고음질 외 묘수가 없다. | |
예컨대 카잘스가 남긴 무반주 첼로(Angel)와 상업적으로 경쟁하려면 연주자 이외의 방법을 찾는 것이 현실적이며, 카잘스의 녹음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이 거의 유일할 것으로 보인다. 커쉬바움(Ralph Kirshbaum / Virgin Classic)이나 비스펠베이(Pieter Wispelwey / Channel Classic)의 무반주 첼로 조곡을 들어보면 독주악기에서도 녹음의 차이가 이토록 크게 나타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녹음의 품질이 연주의 품질과 비견될 수 있는 지표라는 점 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카잘스가 본 연주를 놓고 갖는 감성적 성역에 대해서는 논외의 얘기이지만 말이다.
명반도 다양한 시각에서 생각해봐야
고전적인 명반이라 하면 아티스트의 지명도와 연주의 품질, 그리고 하나 더하자면 희소성을 추가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디지털 미디어를 살아가는 현 시점에서 볼 때(그 이전부터 중요한 지표였지만), 그 효과를 극대화시킨 녹음이 잘 결합되어 마무리되었을 때 음반의 가치는 높아진다. 명반이란 특정 곡목을 놓고 볼 때 다수의 음악애호가들에 의해 공통적으로 표적이 되는 음반이기도 하지만, 개개인에 따라 다양하게 지목하는 다양한 음반들의 집합체이기도 하다. 이처럼 명반 또한 입체적이고 다양한 시각에 근거해서 파악해야 할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 |
글 오승영 / 오디오 평론가, 전 <스테레오뮤직> 편집장
- 연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폴리그램, EMI, 소니뮤직, 유니버설 뮤직에서 마케팅 매니저로 일했으며, <스테레오뮤직> 발행인 겸 편집장을 지냈다. 현재 연세대학교 미디어아트 연구소 객원연구원 및 강사이다.